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그래서 아이들과 내가 합의를 본 것은 ‘접어서 (일기장) 내기’ 방법이다. 일기장에서 선생님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내용은 반으로 접어서 내고, 봐도 무방한 부분은 펴서 내기로 했다. 나는 접힌 일기 내용이 궁금하긴 하지만 절대 읽지 않았다.
그렇게 학기가 시작되고 아이들의 일기를 읽어 가던 3월 첫 주, 내게 엄청난 충격과 큰 웃음을 동시에 준 일기가 있었다. 내용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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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이 되면 공부도 어렵고 인생도 어려울 줄 알았는데, 막상 되어 보니, 공부도 쉽고 인생도 쉽다.’
하얗고 통통한 얼굴에 눈이 작은, 학교생활에 무심해 보이던 한 남학생의 일기였다. 나는 이 일기를 읽으며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다음 날, 수업 시간에 ‘열 살 인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 봤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한 자리 숫자의 나이가 아니야. 두 자리 숫자 나이인 만큼 자신의 행동과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해.”
내 키의 ‘반 토막’만 한 녀석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듣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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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맹랑한 말을 해 나를 당황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일이 많아 야근을 하고 난 다음 날이었다.
“선생님 얼굴이 왜 그래요? 술 마셨어요?”
녀석들이 초췌해진 내 얼굴을 대번에 알아봤다.
“아니야. 어제 밤 11시에 퇴근했더니 힘들어서 그래….” 그랬더니 꽁지머리의 작은 여자 아이가 나서서 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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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아이들 절반은 ‘쥐꼬리만 한 월급’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말을 한 꽁지머리 아이와 날 번갈아 쳐다봤고, 몇몇 아이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낄낄댔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날 저녁 난 옆 반 선생님과 술잔을 기울였다. 열 살 제자에게 ‘쥐꼬리만 한 월급’이란 말을 들으며 교사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6학년을 맡으면서 이제 제법 머리 커졌다고 매사 무심한 표정으로 ‘어른 흉내’를 내려는 아이들에게 적응할 즈음 스승의 날이 찾아왔다.
쉬는 시간에 줄줄이 찾아온 내 작년 3학년 제자들. 이제 4학년이 됐고 키도 훌쩍 커서 ‘반토막’은커녕 내 목 위로 올라온 녀석들도 보였다. 그중엔 장난꾸러기, 말썽꾸러기로 내 속을 썩였던 아이들도 있었는데 정성스레 색색으로 편지를 써서 고이 접어 와 감동을 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던 녀석들, 매일 남아서 나머지 숙제를 하던 녀석들이었는데….
나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편지들을 하나씩 펼쳐 보았다. 작년 제자들은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편지 내용에 나는 배를 움켜잡고 한참을 웃었다.
장민경 초등학교 교사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의 세상이 보여 움찔한다. 그리고 어른인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두렵다. 열 살 갓 넘었지만 알 건 다 아는 요즘 아이들. 우리 어른들은 과연 그 아이들에게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 주고 있는 걸까. 사랑한다! 내 ‘반토막’이었던 제자들. 2021년 4월 1일에 꼭 ‘소맥’을 먹자꾸나!
장민경 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