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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방형남]러시아 極東이 한국을 부른다

입력 | 2012-08-25 03:00:00


20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혁명광장에서 북한 노동자 15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비를 맞으며 화단 정비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국땅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북녘 동포들이 허드렛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기분이 착잡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것은 경계심 가득한 눈길뿐. 허연 피부의 러시아 행인들 때문인지 햇볕에 그을린 북한 노동자들의 얼굴이 유독 시커멓게 보였다.

푸틴과 APEC이 제공하는 기회


북한 노동자의 모습에 혁명광장의 역사가 겹쳐 흘렀다. 러시아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의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극동지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느닷없이 혁명광장에 집결시켜 6000km 떨어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쫓아냈다. 수많은 고려인이 짐짝처럼 열차로 수송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7만여 명의 고려인이 사막이나 다름없는 허허벌판에 버려졌다. 강제이주 이듬해 7000여 명, 그 다음 해 4800여 명이 숨졌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러시아의 극동은 다른 모습으로 만나고 있다.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광장 앞 대로를 지나는 버스는 대부분 현대차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가장 흔한 외국 광고 또한 LG를 비롯한 한국기업 홍보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다음 달 8, 9일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블라디보스토크에 230억 달러를 퍼부었다. 그의 극동 개발 및 주변국들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열망은 5월 취임과 함께 출범시킨 극동개발부에서도 잘 드러난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는 새로 건설된 교량 도로 건물로 활기가 넘쳤다. 정상회의장인 루스키 섬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3.2km의 연륙교는 장관이다. 루스키 섬에는 30개국 정상들이 사용할 회의장과 숙소가 들어섰다.

러시아가 APEC을 계기로 획기적인 경제협력 확대를 바라는 첫 번째 후보가 한국이다.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과 러시아 극동연방대가 공동 주최한 국제포럼에 참석한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루킨 아르툠 극동연방대 교수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이야말로 한국과 가장 효과적인 경제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바라는 한-러 협력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남-북-러 천연가스관 사업에 머물지 않는다. 미하일 홀로샤 극동기술연구소 소장은 러시아가 추진 중인 거미줄 형태의 교통망 건설 계획을 공개하면서 북극항로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고속철 건설사업에도 한국의 참여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서울에서 불과 744km 떨어져 있다. 그 너머에는 극동지역만 따져도 한반도보다 15배나 넓은, 자원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이 펼쳐진다. 이런 곳에서 한국을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中日 제치고 달려갈 수 있다


러시아의 극동은 지정학적 이유로도 우리에게 기회의 땅이다. 이양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러시아와 중국은 절대로 손을 잡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러시아는 2차례 전쟁을 치른 데다 영토분쟁까지 겪고 있는 일본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각축전을 벌여야 하는 한국에 러시아 극동은 ‘단독 찬스’나 마찬가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이다. 1863년 처음으로 러시아로 이주한 조상들처럼 러시아의 동방으로 뻗어나가야 진취적인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시간이 별로 없지만 내년에 들어설 새 정부는 러시아의 극동을 한국 경제의 도약대로 활용하는 혜안이 있었으면 한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