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는 왜 ‘웰 다잉’ 강사가 되었나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오늘부터 화요일자 오피니언면에 ‘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올해 70세인 필자는 몇 년 전 딸과 아내를 잇달아 암으로 잃은 뒤 ‘웰 다잉(well dying)’의 문제를 파고들어 말기 암환자들이 편안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호스피스와 웰 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 경제부장, 일본총국장, 편집국장 등을 지낸 칼럼니스트입니다.
편안하게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죽음 복(福)’을 부러워하면서도 그 복을 받기 위한 준비에는 소홀한 게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그의 글을 통해 ‘잘 죽는 법, 잘 사는 법’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여름이 지나갈수록 나는 심한 갈증에 시달린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들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 초가을까지 그 증상은 더 심해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의 목마름은 울창한 숲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허전함을 메우지 못해 나타난 신체적 반응이다.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추억은 여름 땡볕에서도 시들지 않다가 이 계절의 막바지에 달궈져 더 큰 갈증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행에 나설 때는 두 사람의 추억을 안고 간다. 등에 멘 하늘색 배낭은 작년에 세상을 떠난 아내가 즐겨 쓰던 것이고 그 안에 챙겨 넣은 검정 털모자는 7년 전 숨을 거둔 딸의 애용품이다. 이 유품을 통해 두 사람에게 세상의 구석을 보여 줄 수 있어서 나는 덜 외롭다.
내가 호스피스 강사가 된 것은 두 사람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자궁경부암으로 투병 중이던 딸은 말기 상태에서 수술을 거부하는 소동을 몇 차례 벌였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막무가내로 거부해 가족을 자주 울렸다. 더는 치료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고통이나 마찬가지라고 딸은 메모지에 적었다.
영양 급식 튜브가 목을 가로질러 꽂혀 있었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 대신 메모지에 눈물 젖은 문자를 날리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은 형벌이었다. 당시 32세이던 딸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기를 기다리는 보통의 주부생활에 흡족해 하다가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으면서 수난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이 젊은 여성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빨리 무너지는지를 아빠인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 사용도 거부하는 서류에 서명했던 날 딸은 호스피스 아카데미 교육을 받아보라고 나에게 권했다. 입원해 있던 국립암센터가 국내 여러 병원에 있는 의료진이나 성직자 등에게 시행하는 특별교육이었다. 병원 복도에 붙어있는 모집광고를 눈여겨본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의사도 이 교육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딸은 입원 중에 터득한 것이라면서 어떻게 투병생활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삶의 좋은 마무리라는 게 어떤 것인지 고통 받고 있는 환자와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말기환자에게도 무조건 수술을 권장하는 것은 좋은 간병이 아니라고 핀잔을 주었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를 나는 늘 생각했다. 우리 주변에서 보는 추한 죽음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이며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회는 어떤 제도를 갖춰야 할 것인가를 더듬기 시작했다.
4년 전에 ‘해피 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라는 책을 쓰기 위해 국내 여러 지역을 관찰하고 미국과 일본 등을 방문취재했을 때 아내를 동반했다. 아내가 딸의 죽음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미국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있는 많은 환자를 보고 나서였다. 그 뒤로 아내는 ‘딸이 편안하게 갔다. 잘 갔다. 그것도 제 복이지’라고 자주 중얼거렸다. 그러다 자신에게 큰일이 벌어졌다.
나는 시민단체나 대학교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호스피스 강사로 활동하면서 가족의 비애를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했으나 아내는 너무 허약했다. 딸을 먼저 보낸 슬픔이 쌓이고 쌓여 독이 되는 것을 풀지 못했다.
최철주 호스피스·웰다잉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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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주 호스피스·웰다잉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