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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강준호]메달이 아닌 스포츠 자체를 즐긴 첫 올림픽

입력 | 2012-08-14 03:00:00


강준호 서울대 교수 스포츠경영학

‘한여름 밤의 꿈’이 끝났다.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우리 젊은이들의 승전보가 살인적인 폭염과 실망스러운 정치권에 지친 온 국민의 심신을 시원한 계곡물처럼 적셔 주었다.

대한민국은 12개 종목에서 13개의 금메달, 8개의 은메달, 7개의 동메달을 획득하며 양적, 질적으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매일 새벽 감동의 드라마를 선사해 준 선수단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지난 한 세기, 한국 스포츠는 질곡과 기적의 현대사와 궤를 같이해 왔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참가한 조선 청년 손기정의 마라톤 금메달은 민족 광복의 서광으로 다가왔고,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출전한 67명의 ‘조선올림픽대표단’은 신생 독립국가의 공식적인 데뷔를 알렸다.

축제처럼 보낸 한여름 밤

그로부터 40년 후 열린 88 서울 올림픽은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뤄 낸 ‘한강의 기적’을 세계에 각인시켰으며, 2002 한일 월드컵은 민주화까지 이뤄 낸 우리 사회 내부의 뜨거운 문화적 역동성을 보여 줬다.

그리고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달성한 금메달 기준 종합 5위, 총 메달 기준 종합 9위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1인당 국민총생산 2만 달러와 인구 5000만을 충족해 ‘20-50 클럽’에 가입한 대한민국 위상에 걸맞은 성과다. 더 주목할 것은 한국사회의 가치와 문화가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는 사실이다.

첫째, 우리는 스포츠를 즐겼다.

2012 런던 올림픽은 메달의 색깔과 수보다 경기 자체를 즐기게 된 첫 올림픽이 될 것 같다. 과거에 우리는 금메달만 주목했고 은메달 동메달을 딴 선수들은 기가 죽었다. 이제는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 동메달이 있고 심지어 우리가 메달을 따지 않아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선수들도 밝고 생기 있고 당당했다.

우리는 비로소 스포츠가 인간의 신체적 탁월성을 보여 주는 활동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사인 볼트의 폭발적인 파워와 손연재의 환상적인 연기, 박태환과 쑨양을 보면서 인간의 몸이 땅에서 물에서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또 축구 종주국 영국을 그들의 안방에서 침몰시킨 축구 8강전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 스페인전 때의 극적인 승부차기를 다시 보는 듯한 짜릿함 그 자체를 즐겼다. 런던 올림픽을 통해 우리는 스포츠가 즐거움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가장 대중적으로 건전하게 충족시켜 주는 영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둘째, 우리는 스포츠로 감동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국가 순위보다 개인의 감동 스토리가 더 주목받았다. 본래 올림픽은 국가 간 경쟁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선수 간 경쟁을 지향한다. 따라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국가별 순위를 발표하지 않는다. 스포츠에는 본래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수많은 감동 스토리가 있다.

엘리트 선수는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합일을 이루는 ‘궁극의 체험’을 한다. 그것이 성공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다. 최고난도 신기술을 개발한 양학선의 ‘완벽 착지’. 이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이다. 그 순간을 이뤄 내기까지의 양학선의 삶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교통사고로 부상한 몸으로 최선을 다한 후 떨어뜨린 바벨에 입을 맞추고 감사기도를 하는 ‘거인’ 장미란의 모습은 또 얼마나 가슴 뭉클했던가.

비단 우리 선수뿐 아니다.

육상 남자 110m 허들 예선에서 넘어져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찢어졌으나 왼발로만 끝까지 결승선을 통과한 중국의 류샹,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 71세에 마장마술대표로 출전한 일본의 호케쓰 히로시 같은 선수는 모두 자신의 삶과 철학을 각본 없는 드라마로 전달했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여 준 예술가였다. 감동에 목마른 국민에게 그들의 체험은 시원한 생수(生水)가 되었다.

메달 개수만 세던 예전과 달라


마지막으로 우리는 스포츠로 행복했다.

행복을 느끼려면 나(자아)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선수나 팀을 좋아하면 동일시하게 되고 그럴수록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으로 전이된다. 축구 종가(宗家) 영국과 영원한 라이벌 일본을 꺾은 홍명보 사단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고 실격 판정 번복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한 박태환의 값진 성취는 곧 나의 성취이다. 부상 선수들을 이끌고 4강에 진출한 강재원 감독이 이끈 핸드볼 전사들의 투혼도 나의 투혼이며 양궁 오진혁이 금메달을 위해 쏜 마지막 한 발이 10점 만점 과녁에 명중할 때 느낀 환희야말로 곧 나의 환희이다.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금메달을 목에 건 유도 김재범의 포효는 나의 포효이고, 아시아 최초로 종합 5위에 오르며 세계를 홀린 리듬체조 손연재의 가능성은 바로 나의 가능성이다. 스포츠는 이렇게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만큼 국민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축제는 끝났다.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해야 할까?

국민은 이제 국가보다 개인의 삶을, 결과보다 과정을, 양보다 질을 원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 올 것이다.

이제 스포츠도 국민의 기본권이자 삶의 일부로, 행복증진 수단으로 인식하고 스포츠 생태계와 문화를 선진화해야 한다. 선수도 행복하고 일반 국민도 스포츠에 더 많이 참여하고 즐기면서 행복해져야 한다. 스포츠야말로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사회의 긍정적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사회적 자본’이다. 이제 우리도 국위선양을 위한 스포츠에서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스포츠로 만들어 가자.

강준호 서울대 교수 스포츠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