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해도
▶쏘가리(‘어해도’ 중·19세기 후반),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종이에 먹, 29.0×91.0cm. 쏘가리와 바위의 위치는 평면적인 패턴으로 재구성됐다. 쏘가리가 복숭아꽃을 머금은 장면은 시적 은유가 넘치면서도 웃음을 자아낼 만큼 해학적이다.
― 김훈의 ‘흑산’ 중에서
조선왕조가 천주교도를 박해한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경북 포항의 장기로 귀양을 갔다. 그의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1758∼1816)은 전남 흑산도로 보내졌다. 정약전은 그곳에 머물며 바닷물고기의 생태를 관찰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었다. 그는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물고기의 언어를 인간의 그것으로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유배 생활에서 몰려오는 외로움을 견디고, 두려움을 잊기 위한 그만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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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이고 사실적인 장한종의 쏘가리
정조(1752∼1800) 재위 시절인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문화가 르네상스를 맞이한 때였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어해도의 중심에는 궁중화원인 장한종(張漢宗·1768∼1815)이 우뚝 서 있었다. 풍속화와 진경산수화처럼 사실적인 화풍이 대세를 이뤘던 시기, 그의 어해도 역시 사실성을 추구하는 시대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장한종은 여러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유재건(劉在建·1793∼1880)의 책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도 등장한다. 이 책은 중인 이하 계층인 여항인(閭巷人)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장한종은 어릴 적 숭어, 잉어, 게, 자라 등을 사서 그 비늘과 등딱지를 자세히 관찰하고 본떠 그렸다고 한다. 그림이 완성되면 그 핍진(逼眞·실물과 똑같이 닮음)함에 찬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책은 전한다.
명성만큼 많은 작품이 전하지는 않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어해도화첩’은 장한종의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화첩 가운데 쏘가리를 그린 그림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장지화(張志和)가 지은 ‘어부사(漁父詞)’의 한 구절을 형상화한 것이다.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찐다(桃花流水魚肥)’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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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적이고 도식적인 민화의 쏘가리
궁중에서 유행한 어해도는 19세기 후반 민간으로 옮겨지면서 오히려 더 성대한 불꽃을 태우게 됐다.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어종이 대폭 늘어났고, 토착화의 경향마저 나타났다. 동해와 맞닿은 곳에서는 갈치, 학꽁치, 문어, 청어, 개복치를 등장시켰고, 서남해에선 아귀, 홍어, 쏠종개, 웅어, 성대, 망둑어를 그렸다. 지역색이 뚜렷해진 것이다.
아울러 입신출세처럼 자기중심적 상징에서 벗어나 부부 금실이나 다산 같은 가족 중심의 상징체계도 다루게 됐다. 그래서 민화 어해도 중에는 물고기들이 쌍으로 등장해 사이좋게 유희를 즐기거나 서로 교합하는 장면이 유난히 많다. 최근 어해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에스더 씨는 이런 변화의 원인으로 갑오개혁(1894∼1896) 이후의 과거제도 철폐와 한일강제병합을 꼽았다.
강원 영월의 조선민화박물관에 소장된 민화 ‘쏘가리’에서는 장한종과 차별화된 해석이 돋보인다. 화면 위에는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찐다’는 장지화의 시가 적혀 있다. 그러나 민화 작가는 사실적인 표현 대신 쏘가리가 복숭아꽃을 머금으며 희롱하는 시적 은유를 택했다. 패턴도 도식적으로 재구성했다. 다른 민화 중에는 쏘가리의 얼룩무늬를 아예 복숭아꽃 문양으로 그린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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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그림을 방에 족자로 걸어놓거나 병풍으로 꾸며놓아 보자. 그러면 어항을 들여놓았거나 조금 과장하면 마치 수족관에 온 것 같은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민화 어해도에는 부부 금실이 좋아서 자식을 많이 낳고 그들이 자라서 출세하기를 바라는 행복의 염원이 깃들어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정병모 경주대 교수(문화재학)·한국민화학회 회장 chongpm@gj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