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문화사도널드 서순 지음·오숙은 외 옮김/전 5권·500∼672쪽·각권 2만8000원·뿌리와이파리
1911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이 발행하는 신문에 실린 삽화 ‘자본주의 체제의 피라미드’. 맨 아래에는 모두를 먹여 살리는 노동자들이 있고, 차례로 그 위로는 기생계급인 부르주아지, 사람이 아닌 자본을 보호하는 군대,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라고 설득하는 성직자들, 지배계급을 위해 기능하는 국가 권력자가 있고, 맨 위에는 이 모두를 지배하는 자본이 있다. 뿌리와이파리 제공
미술을 빼놓고 유럽의 문화사를 논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답은 ‘예스’다. 이 책이 담은 내용은 유럽문화사라기보다 ‘유럽근대문화산업사’에 가깝다.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에 유행했던 음악과 신문, 소설, 연극부터 20세기의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그리고 게임까지 다양한 형식의 문화를 총망라한 백과사전식 유럽문화통사다. 방학을 이용해 유럽여행을 계획한 이들 가운데 기자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무지한(!) 감식안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주목해볼 만하다.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영국 런던대 퀸메리칼리지 유럽비교사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미술을 배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문화란 단어는 넓은 의미를 포함한다. 만화도 그래픽디자인도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레이션도 모두 미술이다. 하지만 유럽을 이야기할 때의 ‘미술’은 흔히 한정된 엘리트들을 겨냥해 예술이라고 규정한 유일무이한 물건을 매매하는 투기시장을 전제로 한다.” 그가 2001년 ‘모나리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저급문화’로 치부되는 분야와 산업 양상을 이 책은 생생히 서술한다. 지난 200년간 유럽의 보통 사람들이 밥벌이를 하고 남는 시간에 삶을 즐기거나 시름을 잊는 방식을 조명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기존의 문화사 연구들이 개별 작품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평가하는 것에 그쳤다면 이 책은 출판업자, 편집자, 서적상, 도서대여점 등으로 이뤄진 소설의 상업적 그물망, 오페라하우스와 연주회장의 운영이나 가수의 벌이와 위상, 카바레나 민중극이 인기를 얻은 이유 같은 구체적 일상사를 파고들었다.
저자 도널드 서순 교수
총 2790쪽, 5권에 걸친 방대한 분량이 독자를 압도하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지만 무겁지 않은 서술 덕에 책장은 쉽게 넘어가는 편이다. 저자는 e메일 인터뷰에서 넉살 좋게 “내가 생각해도 길긴 길다. 꼭 처음부터 끝까지 강제로 읽을 필요는 없다”며 “우선 처음과 마지막 챕터를 읽은 뒤 개인의 취향에 맞춰 골라 읽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화가 상품으로서 생산과 유통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거친 시기를 다룬 4권 ‘혁명’은 꼭 읽어봤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