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국제부 기자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투표를 위해 남포시 강서구역 태성리를 찾은 김일성에게 마을의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수상님, 얼굴이 많이 축간 것 같은데 너무 근심 마십시오. 종파놈들이 인민생활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도 다 잘살게 되었으니 일없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기지 종파놈들이 이기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우리는 수상님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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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시대에 태성할머니가 있었다면 김정일 시대엔 정성옥이 있다.
1999년 스페인 세계육상선수권 여자마라톤에서 우승한 정성옥은 우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 “결승지점에서 장군님이 어서 오라 불러주는 모습이 떠올라 끝까지 힘을 냈다”고 대답했다.
이 말에 감동한 김정일은 정성옥에게 ‘공화국영웅’ 칭호와 벤츠500, 평양의 고급주택을 하사했고 우승 상금 6만 달러도 모두 갖게 했다고 한다. 북한에선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겐 공화국영웅보다 낮은 노력영웅 칭호와 우승 상금 일부만 준다.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5개나 딴 유도 스타 계순희도 노력영웅에 불과하다. 정성옥은 선군 시대의 영웅으로 정신적 풍모의 귀감으로 떠올랐다. 그런 정성옥이 몇 년 뒤 조선신보에 “애인이 직접 채워 준 손목시계를 보며 힘을 내 우승했다”고 털어놓았다.
어쨌거나 정성옥 이후 국제경기에 나온 북한 선수들은 “장군님을 생각하며 힘을 짜냈다”는 상투적 대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같은 말에 특허료가 두 번 지불될 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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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살 때 기자의 동창 중에 ‘말반동’의 손자가 있었다. 1970년대에 할아버지가 재혼할 때 결혼식장에서 술에 취해 “재간도 좋다”고 말하는 친구들에게 “수령님도 두 번 갔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 날 새벽 할아버지는 보위부 차에 실려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자식들이 함께 끌려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손자는 태어날 때 반동의 자손이라는 굴레를 쓰고 나와야 했다.
그런 북한을 탈출해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남쪽에 오니 행복했다. 하지만 요샌 말 한마디에 운명이 뒤바뀌는 북한의 비정상을 마냥 비난하는 게 찜찜하다.
“‘각하 빅엿’ 한마디로 꼴찌 판사가 국회의원이 되고, 지난 총선에서 저질 막말로 논란을 일으킨 한 후보가 44%를 넘는 지지를 받은 남쪽은 그럼 정상이냐”고 되물으면 할말이 없다. “그래도 죽이진 않잖아” 이렇게 대답해야 하나.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