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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신광영]‘남편살해 부른 가정폭력’ 뒤엔 뒷짐진 공권력이 있었다

입력 | 2012-07-02 03:00:00


신광영 사회부

국내 유일의 여자교도소인 청주여자교도소엔 164명의 여성이 살인 혐의로 수감돼 있다. 그 가운데 무려 81%인 133명(2006년 기준)은 남편을 죽인 수감자다. 이들은 대부분 남편 살해 이전엔 형사입건 한 번 된 적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경기대 이수정 교수의 조사 결과 그들 가운데 82.9%가 남편한테 학대를 당했고 이 중 44.5%는 ‘안 맞고 살기 위해’ 남편을 살해했다.

가정폭력이 심했다고 해도 남편을 살해한 여성에게 정당방위가 인정된 적은 없다. 당장 생명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이뤄진 반격이 아니었던 탓이다. 남편 눈빛 하나에 숨을 죽이곤 했던 아내들은 남편이 칼을 내려놓거나 잠들었을 때 비로소 ‘용기’를 내고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죽이면 과실치사로 간주될 때가 많다. ‘평소 때리던 수준으로 때렸을 뿐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남편의 주장은 대부분 받아들여진다. 반면에 아내는 살해할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긴 ‘확신범’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상습적 구타 끝에 아내를 살해한 남성은 3년 이하 징역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범행한 여성은 5년∼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런 부조리를 막아야 할 공권력은 무능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여성의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하던 경찰이 가해 남성에게 전화를 걸어 ‘신고한 적 없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피해여성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남편을 처벌해 달라고 하지 않으면 ‘별수 없다’며 돌아서는 경찰관도 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합법적으로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다. 경찰을 부른 후엔 남편의 보복 폭행이 이어지고 학대의 기술이 더 교묘해진다는 게 그들이 터득한 ‘신고의 법칙’이다. 좌절을 반복하다 그들은 ‘죽느냐 죽이느냐’의 갈림길에 선다.

미국에선 ‘가정폭력 피해여성은 남편의 처벌을 반대한다’는 전제 위에 정책을 만든다. 출동한 경찰관은 도착 즉시 남편과 아내를 완전히 분리한 뒤 피해를 조사한다. 남편을 체포하거나 접근금지명령을 내릴 때도 아내의 동의 여부는 따지지 않는다. 검사는 아내의 비협조로 남편의 유죄를 입증하기 어려우면 ‘기소를 안 하는 대신 접근금지명령을 수락하라’는 조건으로 남편과 플리바기닝(유죄협상제)을 해 어떻게든 피해자를 보호한다.

가정폭력은 모든 폭력의 시작이다. 얼마 전 서울 신촌에서 대학생을 살해한 10대들 역시 아버지한테 오래 학대를 받아온 자녀들이었다. 가정폭력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에서 가정은 폭력을 잉태하는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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