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문화부 차장
대한민국 성공신화를 대표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신 탓일까. 예전에 비해 대한민국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뉴스가 많아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공가도를 달려왔다고 앞으로도 그렇다는 보장이 있을까. 요즘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20세기 다이내믹(dynamic) 코리아’가 아니라 ‘19세기 스태틱(static·고정된) 조선’이 떠오른다.
19세기 조선은 왜란이나 호란 같은 큰 외침을 겪지 않았다. 16∼18세기 조정을 물들였던 사색당파 투쟁도 잠잠했다. 임금들의 치세 기간도 비교적 길었다. 그럼에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외세의 개입에 수수깡 무너지듯 쓰러졌다.
500년 전 채택한 국가운영 철학(성리학)을 고수하면서 변화의 기회를 놓친 채 고인 물처럼 서서히 썩어갔다. 정치권력은 소수 명문가가 장악했고 관직은 그들의 측근들로만 채우는 ‘끼리끼리 문화’에 중독됐다. 조선이 망한 건 당파싸움 때문이 아니라 당파싸움마저 무력화시킨 세도정치 때문이었다.
조선 초만 하더라도 건국공신 중심의 관학(官學)세력에 맞서는 사림(士林)세력이 존재했고, 사림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선조 이후에도 동인과 서인이 경쟁했다. 이는 다시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해왔다.
하지만 영정조 시대를 거치며 노론 세력을 중심으로 한 경화세족(京華勢族)이 권력을 장악했다. 정조가 죽은 1800년 이후론 아예 노론 시파를 중심으로 몇 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보다는 가문과 연줄을 중시하는 부패가 만연했다. 유능한 인재 대신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예스맨들이 국가의 실핏줄을 장악하면서 시스템 전체가 괴사하고 만 것이다.
이를 대한민국에 적용해보자. 대한민국의 근대화세력이 관학세력에 해당한다면 민주화세력은 사림세력에 비견할 수 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뒤 여야 권력교체가 몇 차례 이뤄진 과정은 사색당파의 권력쟁투기라 할 만하다. 하지만 노무현 이명박 정부에선 견제세력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요직은 물론 말단 기관장까지 측근들로만 채우는 ‘19세기 조선’ 현상이 공공연히 벌어져 왔다.
우리가 지금 기억해야 할 것은 20세기 이후 대한민국의 성공신화가 아니다. 연고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젖어 변화의 동력을 상실한 19세기 조선의 쇠망사다.
권재현 문화부 차장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