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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메트로 달인]선사박물관 구석기인 16년째 재연 정찬교 씨

입력 | 2012-06-04 03:00:00

‘원시인 연기’ 위해 며칠씩 돌만 깬 적도 있어요




연극배우 정찬교 씨가 지난달 초 경기 연천군 구석기 축제에서 구석기시대 원시인 차림으로 당시 생활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정 씨는 16년간 연천군 전곡읍 선사박물관 선사시대 체험 프로그램과 축제 등에서 공연을 벌여 왔다. 연천군 제공

TV나 박물관에서 흔히 보는 원시인은 유인원 같은 생김새라 그야말로 야만인이다. 수도권에서는 이 원시인을 좀 더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다. 30만 년 전 이런 구석기인이 활동하는 곳은 바로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선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의 핵심인 원시인은 주먹도끼를 사용하고 실제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우고 있다. 연극배우 정찬교 씨(51)는 16년 동안 구석기시대 원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 원시인, 연천에 나타나다

지난달 19일 평온하던 선사박물관 야외 체험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움집을 짓던 관람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헝클어진 머리에 구릿빛 피부, 맨발에 동물 털을 몸에 두르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허리엔 아슐리안(전기 구석기시대)형 주먹도끼를 찬 원시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움집 주변에 둘러앉은 원시인 서너 명은 도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잘라낸다. 입고 있던 동물 가죽을 찢어 체험하러 온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기겁하며 얼른 엄마 뒤에 숨었다. 이들은 관람객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직접 불을 피우고 돌칼로 고기를 잘라 구워먹었다. 잠시 후 우두머리격인 원시인 한 명이 하늘을 보며 소리를 지르자 원시인들은 구부정한 모습으로 신나게 춤을 춘다.

원시인 전문배우로 살고 있는 정 씨가 동료들과 함께 야외무대에서 펼치는 원시인 퍼포먼스의 한 장면이다. 정 씨는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선사박물관에서 이뤄지는 선사시대 체험 프로그램이나 연천 구석기 축제의 최고 명물이다. 정 씨의 연기가 하도 리얼해서 ‘전곡리의 호모에렉투스’ ‘원시인 추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 연극배우, 각본 없는 원시인에 빠져

정 씨는 “내가 현대시대에 온 것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선사시대에 왔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원시인으로 사는 모습을 상상하며 수도 없이 분장과 연습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로에서 배우로 활동했지만 소규모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도 쉽지 않았다. 1996년 아는 교수의 부탁을 받고 한 대학 문화인류학과 야외실습시간에 원시인 역할을 맡은 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정 씨는 “표정과 대사, 말투까지 각본에 짜인 대로 역할을 하다 즉흥연기를 해보니 낯설기도 했지만 짜릿한 느낌이 강했다”고 말했다. 이후 구석기 및 원시인 이벤트나 축제 등에 불려 다니면서 국내 원조 원시인 전문 배우로 살아가게 됐다.

정 씨는 야외 퍼포먼스가 없는 날이나 겨울에는 대학로 연극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원시인 연기는 정 씨에게 일반 연기와 다르고 더 매력적이다. 고도의 상상력과 즉흥연기를 할 수 있기 때문. 원시인 연기를 위해 웬만한 문화인류학 서적도 다 읽었다. 주변에서는 “배우보다 문화인류학 박사 공부를 하라”고 권할 정도다. 전문가가 다된 요즘도 새벽에 일어나 맨발로 산을 오르고 나무를 탄다. 돌 깨는 느낌을 몸에 익숙하게 하려고 원시인처럼 한탄강변에서 며칠을 돌만 깨기도 한다. 불을 지피는 연습도 하고 움집을 직접 만들어 살아보기도 한다. 정 씨는 “현대에서 원시인으로 산다는 건 참 매력적이다.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세상일 다 잊고 마음도 한없이 맑아진다”며 웃었다.

조영달 기자 dalsar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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