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국회의원들이 정쟁에 ‘다걸기(올인)’하느라 본회의도 열지 못한 24일 오후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의료계에 몸담고 있는 A 씨였다. 그는 상당히 격앙돼 있었다.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지 험한 말을 잔뜩 쏟아냈다.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도 그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이러고도 무상의료를 논합니까? 정치인들이 그럴 자격이 있나요?”
A 씨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18대 국회에서 버림받을 위기에 놓이자 ‘꼭지’가 돌았단다. 이 법안은 중증외상센터 건립과 맞물려 한때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1월 삼호주얼리 호 피랍사건을 계기로 열악한 의료 환경이 지적되면서 중증외상치료센터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정치권에도 이견이 없어 사업은 순조로운 듯했다. 정부는 단계적으로 전국에 16개의 외상센터를 건립하기로 하고, 일단 올해 400억∼500억 원을 투입해 5곳의 문을 열기로 했다.
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조금 늦추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법안이 폐기되면 자칫 대한민국 응급의료 시스템이 크게 후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응급의료 사업 예산은 모두 응급의료기금에서 나온다. 의료기관에서 거둔 과징금의 50%와 교통범칙금의 20%로 이 기금을 만든다. 연간 400억 원 내외지만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이 때문에 2009년 법을 개정해 과속차량 과태료 수입의 20%인 1600억 원을 응급의료 선진화 명목으로 기금에 할당했다.
문제는 지원 기간이 3년으로 제한됐다는 데 있다. 올해 12월이면 지원이 끝나는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1600억 원 지원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여야 합의로 지원 기간을 5년 연장하는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이 개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거쳐 법제사법위원회까지 올랐지만 약사법개정안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복지부는 내년부터 400억 원만으로 응급의료 사업을 해야 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19대 총선이 치러지기 전, 여당과 야당은 복지 공약을 쏟아냈다. 건강보험 혜택(보장성)을 90% 가까이로 올리겠다는 공약도 있었다. 100% 무상의료를 실현해야 한다는 공약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공약들은 내동댕이쳐졌다. 공공의료 중 가장 1차적이며 중요한 응급의료마저 외면당하고 있잖은가. 결국 무상의료 공약은 ‘쇼’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행히 여야가 다음 달 초 본회의를 다시 연다니 마지막 기대를 걸어본다. 국회의원들이여, 이 법안은 민생법안이 아니라 ‘생명법안’이다. 더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쇼를 벌이지 말라.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