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도 반한 타히티의 색채, 원시의 자유를 부른다
타히티 섬 비너스포인트의 일상적인 오후 풍경. 토플리스차림으로 검모래 해변에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뒤로 현지 프랑스인들의 전원주택이 보인다.
○ 고갱과 러브어페어를 불러들인 섬
타히티라고 하면 대개 사람들은 워런 비티와 아넷 베닝이 주연한 영화 ‘러브어페어’부터 떠올린다. 비행기가 엔진 고장으로 비상착륙을 하자 승객 전원은 여객선에 옮겨 타고 인근 섬으로 옮겨 가는데 이 과정에서 사랑에 빠지게 된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일생에 한번쯤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 그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사랑이 시작되는 무대로 내가 봐도 타히티만 한 곳이 없다. 그런 점에서 감독의 선택은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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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게 타히티는 어떤 곳이었을까. 벌써 서너 차례 다녀왔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처음 찾았던 10년 전.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일본 오사카에서 오른 에어타히티누이 항공의 A340-300기가 타히티에 착륙한 건 11시간 30분의 길고 긴 밤 비행을 마친 오전 8시경. 촉촉한 아침 공기로 파란 하늘이 더더욱 싱그러워 보이던 타히티 섬 파페에테(수도)의 파아아 공항에서 항공기의 트랩을 내려서는데 자그만 터미널 앞에서 까무잡잡한 피부에 꽃무늬 원피스를 걸친 키가 훤칠하고 생머리를 늘어뜨린 매력적인 원주민 여성이 보였다. 그녀는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하얀 치자 꽃으로 엮어 만든 레이(꽃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었다. 그때 그 치자 꽃향기가 어찌나 상큼하고 좋던지…. 열대 섬의 수수한 공항터미널에서는 입국 수속을 하느라 줄을 서서 기다리던 20분 내내 원주민 남성 트리오가 기타와 우쿨렐레로 흥겨운 민속음악을 연주했다.
사실 이런 비슷한 분위기는 타히티가 아니라도 체험할 수 있다. 하와이 혹은 동남아의 열대 섬에서도 비슷하게 흉내 내서다. 하지만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공항을 나와서도, 아니 여행하는 내내 이런 소박하고 정감 있는 분위기가 계속되느냐다. 대부분은 터미널만 나서면 복잡한 도심이 펼쳐지고 매연과 소음이 코와 귀를 괴롭힌다. 하지만 타히티는 그렇지가 않다. 프렌치폴리네시아의 가장 큰 섬 타히티의 파페에테에서는 시내조차도 리조트 타운의 한가로움이 지배해서다. 그래서 여기선 누구든 휴식의 섬을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런 만큼 타히티에서 휴식은 그 순도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높다고 말할 수 있다.
○ 산과 바다, 라군과 리조트의 앙상블
보라보라섬을 공중에서 내려다 본 모습. 하늘색의 해변 앞바다가 산호초에 의해 형성된 라군이며 멀리 하얀선이 환초에 부서진 파도다. 라군을 수놓고 있는 트로피컬샬레가 오버워터코티지라는 수상 방갈로다(외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타히티섬의 원주민인 폴리네시안여인. 머리에 치장한 하얀꽃이 치자꽃이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관광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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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원주민은 여행지의 인상을 가장 깊게 지어주는 요소다. 여행 중에 사람과의 교감만큼 기억이 오래가는 게 없기 때문이다. 타히티 주민은 태평양의 섬에만 살아온 폴리네시아인이다. 하와이 통가 뉴질랜드 주민도 모두 폴리네시아인이다. 카누 하나로 수천 km 바다를 정복할 만큼 터프하고 덩치도 크지만 아름다운 미소와 노래, 친절함과 순박함으로 사람을 끄는 다정다감한 민족이다.
해넘이 풍경은 세상 곳곳 모두 다르다. 그중 최고는 어딜까. 내 경험에 비춰볼 때 타히티 섬에서 모오레아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노을이었다. 모오레아 섬은 타히티 섬과 불과 15km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마치 고성(古城) 같다’는 고갱의 말 그대로 산봉우리가 드라마틱하게 치솟은 멋진 경관을 지녔다. 그 섬의 산악은 해질녘이면 그 섬 너머로 지는 저녁 해로 인해 실루엣으로 변하고 그 배경의 하늘은 이내 핏빛으로 물든 채 빨갛게 타오른다. 그러면 타히티 섬의 리조트에서는 열 명, 스무 명이 함께 젓는 대형 카누를 띄운다. 노를 젓는 이는 모두 관광객. 이들은 모오레아 섬을 향해, 아니 붉게 물든 바다를 향해 힘차게 노를 저어 나아간다. 그런 다음에는 카누를 세우고는 차갑게 냉장된 ‘히나노’(로컬 브랜드 맥주) 캔을 꺼내 바다 위에서 하늘 높이 들고는 건배를 외친다. 타히티에서는 해질녘 바다조차도 석양 속으로 힘차게 돌진하는 수많은 카누로 인해 원시의 생명력이 충만하다.
○ 노출이 자연스러운 비너스포인트
이 섬은 폴리네시아인이 3000년 이상 살아온 땅이다. 그 섬이 프랑스에 점령당한 건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완전 합병은 1888년)다. 타히티에는 섬이 118개나 된다. 이 섬은 다섯 개의 섬 군(群·아키펠라고)으로 나뉘는데 그 전체 영토(섬+바다)는 엄청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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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에서는 모든 게 프랑스풍이다. 언어도, 글씨도, 문화도, 휴식까지도. 타히티 섬의 파페에테 시내를 오가는 대중교통수단인 트럭을 보자. 프랑스어 발음으로 ‘르 트뤼크(Le Truck)’라고 부른다. 슈퍼마켓도 프랑스 체인인 ‘카르푸’다. 식당도 프렌치레스토랑이 많고 거기엔 프랑스산 와인은 물론이고 각국의 와인이 즐비하다. 시내 항구의 공원에 밤마다 서는 트럭 포장마차촌도 ‘룰로트(Roulotte)’라는 프랑스어다. 물론 대부분 비즈니스도 프랑스인의 몫이라 프랑스인은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멋진 흑진주 보석에서도 프랑스는 숨쉰다. 이곳은 세계적인 흑진주 산지로 세계 최초로 진주 양식에 성공한 일본 미키모토사도 여기서 진주를 양식 생산하고 있다. 이 흑진주는 여기서 세팅돼 관광객에게 판매되는데 프랑스의 감각과 디자인으로 인기가 높다.
타히티=글·사진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