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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자유주의여, 왜 ‘탄압과 폭력’에 눈감는가

입력 | 2012-04-10 03:00:00

무용극 ‘캔 위 토크 어바웃 디스?’ ★★★★☆




잘 훈련된 무용수들의 절박한 몸짓과 표정, 유럽 내 이슬람 비판을 둘러싼 충격적 논쟁으로 1시간 20분의 공연시간 내내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 ‘캔 위 토크 어바웃 디스?’. 무슬림 여성의 강제결혼 근절 캠페인을 벌였던 영국의 전 하원의원을 연기한 여배우는 위태로운 자세로 차를 마시며 “영국 정치인들은 인종주의자나 이슬람 혐오주의자로 낙인 찍혀 의원직을 잃을까봐 무슬림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에 침묵하고 있다”고 말한다. LG아트센터

공연은 도발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당신은 탈레반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손을 들어보십시오.” 탈레반은 1996∼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악명 높은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세력이다. 이슬람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율법에 투철한 삶을 살기로 유명하다.

관객들은 주저한다. 지극히 세속적 삶을 사는 21세기 문명인이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들보다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음 순간 배우는 탈레반이 저지른 죄악을 열거한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학살을 자행하고, 문화재를 파괴하고, 여성과 아동 같은 사회적 약자를 학대했음을. 그러면서 다시 묻는다. 나치에 대해 같은 질문을 던질 때도 그렇게 주저하겠느냐고.

6∼8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 영국 신체극단 DV8의 ‘캔 위 토크 어바웃 디스?’(로이드 뉴슨 연출·안무)는 이슬람과 관련해 자유주의와 다원주의가 봉착한 윤리적 곤경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판이 두려워 명백한 인권탄압에도 침묵하는 서구사회의 비겁함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슬람문화의 일부 문제점을 지적했다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목숨까지 빼앗는 폭력에 시달린 사건들과 관련 논쟁에 참여한 50명의 인터뷰 답변을 발췌해 구성했다. 소설 ‘악마의 시’로 현상금까지 걸렸던 작가 살만 루슈디, 감독이 살해된 이슬람 여성인권 영화 ‘복종’의 시나리오를 쓴 무슬림(이슬람 신도) 여성, 마호메트 풍자만화를 신문에 게재했다가 테러 위협에 시달린 덴마크 신문의 편집장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영국 내 무슬림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교육을 시키려다 인종차별자로 몰려 파면당한 초등학교 교장, 영국에서만 매년 5000건이 넘는 무슬림 여성의 가정폭력 신고를 접수한 여성인권단체 대표, 그 자신이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으로 이슬람경전인 꾸란과 진화론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글을 발표했다가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된 대학교수….

무슬림으로 보이는 배우 4명을 포한한 10명의 배우는 인터뷰 발언을 딴 대사를 번갈아 읊으며 똑딱거리는 시계추를 형상화하거나 중력의 법칙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문화다원주의라는 미명하에 독버섯처럼 번지는 폭력과 침묵의 악순환에 항변한다. 그것은 결코 이슬람 모두를 향한 것이 아니다. 여성과 아동 같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지키려다 생명까지 위험에 처한 이들을 무관심과 침묵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절박한 몸짓이다. 다원주의를 보장하려다 자신의 존재기반까지 잃어가는 자유주의에 대한 뼈아픈 일갈이다.

이런 현상이 서구에서만 벌어지고 있을까. 작품 속 극단적 무슬림들을 북한 정권을 추종하는 세력들로 바꿔보자. 꾸란 한 권을 태운 미국 목사의 돌출행동에 극렬 대응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자신들이 수백 권의 기독교 성경을 공개적으로 불태운 것을 외면하는 것은 남한 군대의 반북 구호에 극렬 항의하면서 정작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북한의 군사도발을 외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구 국가에 대해 동등한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이슬람 율법(샤리아)은 완벽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언급조차 못하게 막으려는 행태는 또 어떤가. 남한에선 그토록 ‘표현의 자유’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위대한 영도자’를 비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짜 진보’의 행태와 너무도 닮지 않았는가.

‘표현의 자유’와 ‘인권’은 사회적 다수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필요한 게 아니다. 그 보호망에 못 들어 한숨쉬고 흐느끼는 ‘사회적 소수’를 지켜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물며 그 사회적 소수를 배려한답시고 표현의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적용을 유보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 내부에 기생하는 또 다른 기득권세력의 횡포에 눈을 감는 것이다. 골치 아프고 껄끄럽다고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건 구걸이고 복종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