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규 충북대교수 나이테연대측정 통해 밝혀
4년이 지난, 이달 8일에는 숭례문 상량식을 갖고 막바지 재건 작업에 들어갔다.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없어졌던 문화재를 다시 만들 때는 과거보다 훨씬 공을 들여야 했다. 역사, 과학, 문화 등의 전문가들이 복원을 위해 다양한 연구를 해왔다. 숭례문이 타면서 남긴 잔재 등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분석한 결과 숭례문에는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사실이 숨어 있었다.
박원규 충북대 목재·종이과학과 교수는 “건축물 나무 부재(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의 벌채 연도를 알면 건축 시기를 추측할 수 있다”며 “숭례문 목부재 68점의 나이테 연대를 측정한 결과 1860년대에 대대적인 지붕 공사가 있었던 흔적을 찾았고, 조선 태조 때 사용됐던 건축양식을 가진 목부재도 알아냈다”고 말했다.
○ 숭례문 공사, 고종 때 한 번 더… 총 4번의 대규모 공사 있어
숭례문은 조선 태조 5년(1396년)에 창건돼 세종 29년(1447년) 터를 새로 닦으면서 재건됐다고 알려졌다. 성종 10년(1479년)에 대규모 공사가 이뤄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에는 6·25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기 위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한 게 전부다.
그런데 이번 나이테 연대 측정 결과 숭례문의 상층과 하층의 지붕을 받치는 목부재인 ‘추녀’ 7개가 1860년대에 벌채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 중 상층 남서쪽 지붕을 받치던 추녀는 나무줄기에서 껍질 바로 안쪽 부분인 ‘수피’까지 남아 있었다. 수피는 나무가 성장을 멈춘 지점으로 벌채한 연도를 나타내므로 이 부분을 보면 비교적 정확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 측정 결과 상층 남서쪽 추녀가 벌채된 시기는 1866년이다.
한보만 삼아성건축사사무소 실장은 “고종 5년(1868년) 정도에 ‘숭례문 문루와 성문 수리공사가 급하다’는 내용의 개인적인 기록 등이 나온다”며 “그 시기에 지붕까지 들어내는 대규모 공사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대 측정에서 가장 오래된 목부재는 1345년에 벌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부재는 숭례문 상층에서 서까래 위에 들어가는 ‘마룻보’인데, 건축양식이 화재 전 숭례문과 다르다. 이 마룻보는 1961년 공사 당시 기와와 서까래 사이(적심)에서 발견됐고, 따로 보관되다 이번에 연대를 알게 됐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적심에 목재를 쌓아 지붕 곡선 모양을 만든다”며 “적심에 보관된 옛 목재를 분석하면 건축물을 짓거나 수리한 흔적을 추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숭례문복구단에서 고증 조사를 담당하는 조상순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는 “이번 조사 결과 창건 당시와 세종 때의 부재도 많이 드러났다”며 “특히 태조 때 것으로 파악된 옛 마룻보는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실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외에 숭례문의 아래층에서도 과거 양식을 짐작하게 하는 부재가 나왔다. 숭례문 내부 아래층 바닥은 홍예(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성문의 윗부분)만 마루로 이뤄져 있는데 이 부분을 받쳤던 것으로 보이는 ‘귀틀’ 부재 때문이다.
박 교수는 숭례문 목부재의 나이테 연대 측정 결과를 30일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리는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청주=박태진 동아사이언스 기자 tmt198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