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문화부 차장
“뭐를 더 바라겄냐. 인간으로 시상에 왔으므로 짝 만나서 의좋게 지내고 지 새끼 낳아서 젖 먹여 기르고 허는 거여.”
깊은 산골에 사는 촌부도 안다. 사람으로 태어나 최소한의 행복의 조건이 뭔지를. 그런데 자유연애를 맘껏 구가하는 현대의 젊은이들은 정작 이를 모른다. 꿈을 이루기까지는 사랑을 미루겠다는 둥, 일과 결혼했다는 둥, 아이는 진짜 사랑의 짐이라는 둥…. 그들에겐 제 짝을 만나고 새끼를 낳는 일이 너무 진부해서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희망사항)에도 못 오르는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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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실은 SBS 짝짓기 프로그램 ‘짝’에서도 확인된다. 과거의 무수한 짝짓기 프로그램과 달리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쟁쟁한 ‘스펙’(조건)을 갖추고도 짝짓기에 실패하기 일쑤다. 짝을 못 찾으면 펑펑 우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일까. 프랑스의 노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이란 저서에서 이를 명쾌하게 갈파했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안전한 사랑’이란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연애의 고수들만 살고 있을 것 같은 프랑스에서도 상황은 비슷한가 보다. 프랑스에서도 미틱이라는 인터넷 중매사이트가 큰 인기라고 한다. 바디우는 이 미틱의 광고 카피에 주목했다.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같은 문구다.
영어나 프랑스어 표현으로 사랑은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위험사회’에서 앞뒤 재보지 않고 뭔가에 빠져든다는 것만큼 무모한 일도 없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상대의 조건을 고르고 또 고른다. “내가 꼭꼭 감춰왔던 내면의 속살을 보여줬다가 혹시 상처만 받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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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안전한 섹스’는 가능할지 몰라도 ‘안전한 사랑’ 따위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사랑은 나의 존재지평과 타인의 존재지평이 하나가 되는 경험으로 획득된다. 이를 위해선 자신의 전 존재를 타자에게 송두리째 던지는 실존적 모험이 필요하다. 사랑은 무수한 만남이란 우연을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는 선언을 통해 운명으로 바꾸는 결단의 연속으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비극은 차라리 ‘번지점프’는 택할지언정 불확실한 사랑에 몸을 던지려는 이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점이다. MBC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의 러브 스토리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숨어있다. 멸종동물이 되어갈수록 동물원 우리 속에서라도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권재현 문화부 차장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