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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권재현]저주받은 인간, 신성한 인간

입력 | 2012-03-12 03:00:00


고대 로마법에는 ‘호모 사케르’라는 특이한 존재가 있었다. 라틴어로 ‘신성한 인간’이란 뜻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했기 때문에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저주받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사상가들을 비롯해 수많은 서구학자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어떻게 저주받은 인간이 신성한 인간으로 불릴 수 있는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이 수수께끼를 미셸 푸코가 제창한 생명정치 이론으로 풀어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을 2가지 종류로 이해했다. 하나는 조에(zoe)고 다른 하나는 비오스(bios)다. 조에는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벌거벗은 삶’을 뜻한다. 비오스는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가치 있는 삶’을 뜻한다. 고대에는 조에와 비오스의 구별이 뚜렷했다. 푸코의 생명정치론은 근대에 들어 그 구별이 무너지면서 정치권력(비오스)이 국민의 생체(조에)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주요 화두가 됐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아감벤은 푸코의 통찰을 확대해 생명정치가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고대부터 지속된 서양정치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가 호모 사케르로 통칭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호모 사케르는 국가 법질서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국가의 존속을 뒷받침해주는 존재다. 그들은 그 공동체 최고의 예외적 존재인 주권자의 대칭점에 위치한 최악의 예외적 존재다. 호모 사케르는 벌거벗은 삶(조에)과 정치(비오스)가 만나는 교차점이며 국가 권력이 조직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이뤄지는 토대다. 그래서 ‘신성한 존재’인 것이다.

▷호모 사케르는 중세의 ‘늑대인간’과 국제법 질서 밖에 위치한 해적들의 모습으로 늘 존재했다. 문제는 근대에 들면서 이런 호모 사케르가 대량화 일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치 독일 치하의 유대인,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이 된 식민지 국민, 선진국의 불법체류자…. 그 생생한 사례가 바로 우리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북-중 국경을 떠도는 탈북자들은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생명(조에)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저주받은 인간이다. 동시에 북한 최고 권력자로서 김정은의 등장과 맞물려 북한의 정치현실(비오스)을 유지시키거나 전복시킬 수 있는 뇌관이란 점에서 신성한 인간이기도 하다.

권재현 문화부 차장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