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올림픽 女핸드볼 金 주역 김화숙 씨 ‘인생 후반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핸드볼 금메달의 주역인 김화숙 씨는 동남지방통계청 물가조사관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27일 상경한 김 조사관이 서울 중구 봉래동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물가조사 방법을 설명하면서 포즈를 취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7일 서울 중구 봉래동 롯데마트 서울역점.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띌 정도로 큰 키(175cm)의 아줌마가 성큼 들어섰다.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 달라고 부탁하자 “기자와 인터뷰해 본 지 20년이 지나서…”라고 멈칫대더니 이내 8년차 통계조사 요원다운 능숙한 솜씨로 채소판매대 앞에서 공책을 꺼내든다.
부산 중구, 영도구에서 물가조사를 맡고 있는 동남지방통계청 산업물가 통계팀 김화숙 조사관(41). 중학교 3학년 아들을 둔 평범한 통계청 직원이지만, 가슴 속엔 ‘화려한 과거’를 품고 있다. 그는 20년 전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여자 핸드볼 우승의 주역이다. 임오경 오성옥 선수와 콤비 플레이를 자랑하며 올림픽 2연패를 일궈냈다. 당시 시상대 맨 꼭대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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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화려한 운동인생은 거기까지였다. “명색이 실업선수였는데도 월급이 50만 원이었어요. 금메달 땄다고 협회와 팀에서 격려금으로 500만 원을 주는데 그나마 100만 원은 메달을 못 딴 남자팀에 떼 줬죠.”
고행에 가까운 국가대표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 1993년 은퇴했지만 비인기 종목 은퇴선수의 고된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렵게 한 전문대 사회체육학과에 진학했지만 가뭄에 콩 나듯 생기는 지도자 자리는 늘 남자선수 출신 몫이었다. 하다못해 동네 스포츠센터에서도 트레이너로 핸드볼 선수 출신은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1995년 회사원 남편을 만나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나니 집에만 있기엔 몸이 근질거렸다.
“이웃에 살던 친한 언니가 통계청 파트타임 조사요원이었는데, 저한테 딱 어울릴 거라며 같이 하자고 권했죠. 처음엔 겁부터 났어요. 운동만 하느라 학창시절 숫자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2004년 일당 4만6000원의 통계청 생활시간조사 임시직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은 가슴에 묻었다.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느라 힘들게 사는 선배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통계조사는 숫자를 다루는 능력보다 인내심이 더 필요했다. 현장조사에 나설 땐 문전박대는 예사고, 때로는 면전에서 욕까지 들어야 했다. 태릉에서 익힌 인내와 끈기로 버텨냈다.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물가조사 무기계약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가대표 체력’을 밑천으로 7년을 하루같이 자갈치시장과 대형마트, 백화점을 매일 6시간씩 돌았다. “매일 새로운 걸 배우니 머리가 트이는 기분이었어요. 박봉이라지만 운동선수 출신이 사회에서 이만큼 자리 잡기가 사실 힘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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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당시 김화숙 씨.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