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 팔도의 이름난 ‘예기(藝妓)’들이 한양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행사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설극장 무대에 올라 가야금과 판소리를 공연하며 대중 연예인으로 탈바꿈했다.
고려시대부터 기예와 패션을 선도했던 기생들이 연예인으로 변신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조선말 기생들은 라디오 방송 음악프로에 나가 노래를 부르거나 영화배우로, 모델로, 성우로 활약했다. 인기 있는 기생들은 일본이나 상하이로 진출했다. 13세에 기생이 되어 창가로 중국인의 심금을 울린 채란이 대표적이다. 그녀가 부른 ‘팔베개 노래조’는 1910년대 동북아시아 최고의 히트곡이었다. 이처럼 한류바람의 원조였던 기생은 개화기 관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수백 년 동안 예술인이면서 매음녀 역할을 하며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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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매음녀의 으뜸은 비두(鼻頭)라 불린 기생이다. 가채를 틀어 얹은 모양이 코머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갓 기생이 된 동기(童妓)의 처녀성을 살 때, ‘머리를 얹어 준다’고 표현했다. 직업여성과 잠자리를 하고 나서 미용실에 가라며 팁을 주는 것도 이런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은근히 권하여 몸을 판다고 해서 ‘은근짜(隱君子)’라 불린 기생들도 있었다. 도둑을 양상군자라고 부른 것을 빗댄 것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 군자라는 말을 음탕한 여성에게 붙여준 점이 이채롭다.
기생을 제외한 매음녀는 떠돌이 들병이인 유녀, 여사당패, 색주가의 작부 등이 있었다. 성개방화 시대를 맞은 우리 사회의 매음녀는 복잡한 세상만큼이나 그 종류가 다양해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다. 전업 윤락여성을 비롯해 호스티스, 안마시술소나 티켓다방, 퇴폐 이발소 종사자 등 방법과 형태 등에서 천태만상이다. 일부에서는 우리나라를 매춘공화국이라고 혹평하기도 하는데, 가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김재영 퍼스트비뇨기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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