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 문화부장
‘결혼행진곡’으로 친숙한 바그너의 ‘로엔그린’에는 반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정체불명의 기사는 여주인공 엘자와 결혼하기로 하지만 절대 자신의 이름을 묻지 말라고 한다. 의심에 빠진 엘자는 결국 이름을 묻고, 죽을 운명에 처한다. ‘결혼행진곡’은 알고 보면 이름도 모르는 신랑과 결혼할 신부를 위한 행진곡이었던 셈이다.
두 오페라에는 구조주의 문학자들이 세계의 민화와 전설에서 찾아내온 ‘이름 알아내기 동기’가 들어있다. 왜 이름이 중요할까. 구조주의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예전에는 이름이 존재 전체와 등가(等價)였다. 이름을 빼앗기는(누설하는) 순간 존재는 상실될 수 있다. 이름이 그 신비한 기능을 결정적으로 잃은 것은 20세기 초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가 ‘이름이란 이것과 저것을 구분짓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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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식 이름의 근거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시사하는 점이 있다. 소쉬르 이전에도 서양에서 이름, 특히 인명은 여러가지 중에서 뽑아 쓰는 ‘구분짓기’의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성자(聖者)나 친지의 이름을 같은 세대 친척과 겹치지 않게 선택하는 것이 작명의 전부였던 것이다. 반면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다른 문화권에서 이름은 갓 출생한 자에 대한 소망과 희원(希願)을 반영한다. 기자도 유럽 친구들에게 이름이 ‘빛나는 종(鐘)’을 뜻한다고 설명해주면 눈을 반짝이며 매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정당의 이름에도 나라마다 특징이 있다. 예외는 있지만 미국 일본 등은 서구의 인명처럼 ‘공화’ ‘민주’ 등 옛 전통의 익숙한 개념을 뽑아 쓰는 정당명을 선호한다. 한국은 ‘정의’ ‘참여’ 등 독특한 지향점이 드러나는 이름이 많다. 동양식 이름 짓기에 더 가깝다.
여당의 새 이름이야 마음에 드는 사람도,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에는 새 이름을 비틀고 씹는 킬킬거림이 가득하다. 여당이 예뻐서 지켜주고픈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다. 현재의 민주통합당으로 이어지는 옛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간판을 걸 때도 똑같이 수준 낮은 담론들이 판을 쳤다. 싸우면서 닮는다던가.
어쨌거나 채 두 달이 안 된 정당 이름들이 우리 정치계를 움직이게 됐다. 더도 덜도 말고 그 이름들이 희구하고 지향하는 가치의 절반이라도 이뤘으면 좋겠다. 각 당의 이름이 지향하는 대로 우리가 민주적 가치에 충실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며 새로운 세상을 열고… 정의롭고 열려 있고 새천년을 지향했다면 오늘날 ‘정치가 한국의 미래를 가로막는다’는 한탄이 나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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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