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시집 ‘오랫동안’ 펴낸 장석주 시인
“아침에 뱀을 볼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뱀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장석주 시인. 7년 넘게 주역을 공부한 그는 시인이자 도사가 된 듯했다. 문예중앙 제공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같았죠. 한마디로 ‘못 읽었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고, 해설서들을 살펴봐도 제각기 다른 소리만 하고….”
궁금증과 함께 오기가 생겼다. 새벽에 일어나면 손 가는 대로 주역의 한 페이지를 펴 놓고 천천히 살폈다. ‘왜 오늘 난 이 페이지를 펴게 됐나’를 곰곰이 생각하며 주역의 뜻과 자신에 대해 사색했다. 이런 생활이 수년간 지속되면서 점차 눈이 뜨였다.
최근 펴낸 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오랫동안’(문예중앙)은 주역에 푹 빠져 지냈던 수년간의 시간을 시어들로 옮겨낸 결과물이다. 집필에 2년 반이 걸렸다. ‘주역시편’이라는 부제도 달았다.
‘하나는/둘,/안이면서/밖./누군가를 베면서/깊이 베인 자.’(‘강의 서쪽-주역시편·108’ 일부) ‘가나 못 가나./해남은/있나 없나./가면 있고 못 가면 없다./이곳에 너는 없고/저곳엔 내가 산다.’(‘달의 사막-주역시편·199’ 일부)
쉽지 않다. 깊은 함축과 은유에 묻힌 시어는 좀처럼 그 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역의 한 구절이 시가 된 것 같고, 시가 주역이 된 것도 같다.
“시와 주역은 많이 맞닿아 있습니다. 주역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느낌으로 갖고 놀면 재미있어요. 이 시집에 담은 시들도 처음 접하면 ‘무슨 소리일까’ 싶을 텐데,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읽으면 됩니다.”
“시를 쓰는 것도 초험적 세계와 조우하는 것이지요. 시에도 주술성과 예시성이 있습니다. 등단하고서 한 10년 뒤에 등단 무렵의 시집을 보고 소름이 돋은 적이 있어요. 시가 제 삶을 예언했거나, 내가 쓴 시에 맞춰서 내가 살아가고 있었죠.”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다’고 농을 건네자 시인은 껄껄 웃었다. “주역을 읽고 얻은 깨달음을 쓴 것은 아니에요. 사실 주역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무지의 캄캄함’이죠. 64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현관(玄關)의 발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적어 내려갔습니다. 주역시편은 ‘배로 기는 뱀 발이며 개밥에 얹힌 도토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