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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한줄]여행이 끝나는 그 순간 여행은 다시 시작된다

입력 | 2012-01-14 03:00:00


《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평범한 일상의 순간순간, 문득 오래 전, 아주 먼 곳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대기 중일 때, 서울의 뒤편 좁은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 건조한 겨울 볕이 내리쬘 때, 당직을 서기 위해 회사 비상구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을 때, 그럴 때 그곳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듯한 언젠가의 기억이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연상 작용을 거쳐 일순 떠오른다. 바람이 몰아치는 시청역 인근을 걷다 한겨울 암스테르담 유대인지구의 거리가 겹쳐지고, 지하철에 일렬로 앉아 도 닦는 표정으로 졸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뜬금없이 작렬하던 세비아의 오후 햇살이 울컥할 만큼 생생히 떠오르는 식이다.

여행의 추억들은 길고 질기다. 정작 여행지에서는 이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말은 통하지 않고 길은 낯설며 가야 할 곳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행기간과 예산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루트와 비용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고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바가지와 각종 범죄들)과 싸워야 한다. 마치 전투를 치러내듯 여행을 하다보면 왜 굳이 남의 나라 길바닥에 돈을 깔아가며 이 고생인지 의문이 절로 생긴다. 대학시절 일년 정도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이 여행이 내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어떤 의미에서 여행은 여행이 끝나는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 기억은 두고두고 재생되며 우리의 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리움으로 뒤돌아보게 한다.

처음 보는 초췌한 여행객을 위해 반시간 넘게 함께 길을 헤매면서 숙소를 찾아줬던 이스탄불의 남자. 침묵 속의 동행이 어색해 말이라도 걸면 매번 ‘노 잉글리시’라며 미안스레 지어보이던 그 표정. 새벽열차로 프라하에 도착한 여행객을 호객하기 위해 추위에 떨며 텅 빈 승강장에 서 있던 민박집 노부부의 초조한 눈빛. 여행루트가 겹쳐 그 넓은 유럽 대륙에서 자주도 마주쳤던 홍콩 대학생들의 안부. 마주칠 때마다 박장대소하며 기념사진을 찍던 그때의 우리들. 혼자 하는 여행은 외롭고 고단하지 않으냐고 묻던 니스 맥도널드의 덩치 좋던 흑인 경비원. 부다페스트로 넘어가는 열차 안에서 터질 것처럼 방망이질 치던 심장. 톨레도의 어지럽던 골목길과 소용돌이치듯 높이 솟은 나무들. 붉은 화산섬과 피레우스 항구의 저녁노을.

여행의 순간들은 일상에 무뎌진 감성, 삶에 치이며 잊혀진 열정이나 모험심 따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 있게 된다. 매일 밤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지금까지 어디를 거쳤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를 확인한다. 하루치의 목표가 있고, 길 위엔 이정표가 있다. 낯섦에서 출발하는 여행은 오감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가다듬는다. 도시의 공기, 하늘의 색깔, 골목길 냄새, 전깃줄에 앉은 새들, 부랑자들의 표정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 안주한 우리는 놀랄 만큼 모든 것에 무감각하다. 불어오는 바람, 흘러가는 계절, 늙어가는 사람들과 변해가는 스스로에게도. 멀어진 그 시절이 선명해질수록, 지금은 늘 달고 다니는 졸음처럼 이렇게 흐리기만 하다.

여행의 기억들이 손짓하며 나를 그 시절로 불러들일 때마다, 하루키를 유럽으로 떠나게 했던 그 북소리가 내게도 들린다. 심장을 뛰게 하는 곳, 살아 있음을 매 순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전진하라고 충동하고 명령하는 소리. 하지만 신호가 바뀌면 다시 서울의 거리를 무심히 가로지르고, 사람들과 우르르 지하철에서 쏟아지거나 비상구 통로를 빠져나와 사무실의 자리에 앉는다. 철없던 여행은 끝났고 지도 위에 칠해둔 목표들도 사라졌다. 지금 이 삶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어디선가 먼 북소리만 계속 울리고 있다.

appena@naver.com  

톨이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