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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새 야구 글러브를 사려면 공사장 목장갑을 껴야 했다

입력 | 2012-01-05 03:00:00

계약금 없이 연봉 2400만원 ‘신고선수’로 프로 입단한 최인영의 시련 그리고 희망




‘인동초.’ LG 최인영은 열여덟 살 때부터 5년 동안 인력시장에 나가면서 야구를 해왔다. 천신만고 끝에 지난해 LG 신고선수가 됐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의 빚을 갚아 드리고 싶다. 오늘도 수많은 무명선수가 꿈을 향해 뛰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새벽 가을바람은 거셌다. 옷깃을 세워 바람을 막았다. 내 나이 열여덟 살 때 무작정 인력시장에 나섰다. 아저씨들과 함께 간 곳은 이름 모를 공사장. 처음으로 야구공 대신 삽자루를 잡았다. 좋은 글러브가 갖고 싶었다. 고교 1학년 때 없는 살림에도 큰맘 먹고 어머니가 36만 원짜리 국산 글러브를 사줬다. 2년 반을 쓴 글러브는 너덜너덜해졌다. 수없이 수선을 했지만 가죽은 헐고 끈은 끊겼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장비 걱정 없이 야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사장 일을 시작했다. 일당은 알선비 10%를 빼고 5만8500원. 일주일을 막노동해서 손에 쥔 건 41만 원. 그 돈으로 글러브를 사고 나니 5만 원이 남았다.내 이름은 최인영(23). 지난해 2월 계약금 없이 프로 최저 연봉 2400만 원을 받는 신고선수로 LG에 입단했다. 이달 말부터는 경찰청 야구단 소속 투수가 된다. 》
○ 야구로 한을 풀다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4학년 때 강원 춘천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때까지 집안 살림은 넉넉했다. 아버지는 대기업에 다녔다.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불행은 1999년 겨울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친구 빚보증을 잘못 서 빚더미에 올랐다. 빨간 가압류 딱지가 집 안에 가득했다. 아버지는 사표를 냈다. 그 퇴직금으로 어머니가 한식집을 운영했다. 그 식당도 곧 망했다. 빈털터리가 됐다. 부모님은 이혼했다. 아버지는 형을, 어머니는 나를 데려갔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며 나를 뒷바라지했다. 중1 겨울방학 때 태국 방콕으로 가는 전지훈련비 300만 원을 마련하려고 어머니가 식당 두 군데에서 일하다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 한을 야구로 풀었다. 공을 던지고 때리면 잠시나마 가슴이 시원했다.

2003년 가을. 운동을 마치고 늦게 집에 왔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월세 단칸방에선 소주 냄새가 났다. 어머니의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이 느껴졌다. 더는 어머니를 고생시키기 싫었다. 눈물이 났다. 어머니를 끌어안고 “야구를 그만하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야구는 계속하도록 할 테니 그런 말 하지 마라”고 했다.

어머니는 방을 빼고 그 돈으로 야구부 회비를 냈다. 그러고는 서울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식당을 구했다. 둘이 누우면 꽉 차는 조그마한 방.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다짐했다. ‘엄마, 제가 꼭 호강시켜 드릴게요.’

○ 나를 키운 건 8할이 한과 분노

2004년 3월 전국중학야구선수권 서울시 예선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무릎이 굽혀지지 않았다. 양 무릎이 퉁퉁 부었다. 한밤중에 찾아간 한의원 관계자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투수와 유격수를 겸하고 있던 나는 빠질 수가 없었다. 감독님께 아프다고 말했지만 ‘경기장에 나오라’는 말을 들었다. 선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경기 당일 감독님은 약을 건넸다. 강력한 진통제였다. 무릎의 감각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화가 났다. 이를 악물고 경기에 나섰다. 첫 타석에서 그라운드홈런을 쳤다. 고통을 참으며 3루로 향할 때 관중석에 앉은 어머니가 보였다. 미친 듯이 홈으로 달려들었다. 어머니 앞에서 멋진 야구선수로 보이고 싶었다.

경기 직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의사는 “조금만 늦었으면 영영 무릎을 못 쓸 뻔했다”며 혀를 찼다.

강릉고 시절이던 2007년 6월 청룡기대회 16강전. 유신고에 2-7로 뒤진 6회말 등판했다. 패전 처리 투수였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마운드에서 분노를 던졌다. 3이닝 무실점. 그 사이 우리 팀은 7회 1점, 8회 5점을 내며 경기를 뒤집었다. 나는 처음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자신감이 붙었다. 부산공고와의 4강전에서도 6과 3분의 2이닝을 1안타로 막았다. 그때 한 신문에 ‘느린 구속 칼날 제구’라는 제목으로 내 이름이 나왔다. 비록 결승에서 경남고에 0-5로 졌지만 나는 당당히 준우승의 주역이 됐다. 나는 감정이 폭발하면 숨어 있던 잠재력을 발휘했다. 한과 분노가 나를 키웠다.

○ 세 번의 드래프트 낙방

하지만 기쁨도 그때뿐이었다. 고3 때인 2007년 8월에 열린 2008년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아무도 나를 지명하지 않았다. 2년 제인 강릉영동대 시절 두 번의 드래프트 기회를 맞았으나 거기에서 또 떨어졌다. 대학시절의 실력은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앞날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1년에 프로구단이 지명하는 신인은 60∼80여 명. 한 해에 배출되는 야구선수는 700여 명이나 된다. 어릴 적부터 꿈을 키워왔지만 프로에서 뛰지 못하면 대부분은 야구판을 떠난다. 나 역시 그런 신세가 됐다. ‘야구 그만둔 다른 친구들처럼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해야 하나’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학시절에도 들어가는 돈은 만만치 않았다. 학교에서 주는 건 유니폼과 스파이크뿐이었다. 식비 등 생활비 부담이 컸다. 그 사이 어머니는 돈을 많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인천의 한 섬에 들어가 포도농장과 횟집에서 일했다.

대학리그는 여름과 겨울에 휴식기가 있다. 나는 그때마다 사정이 어려운 팀 동료 대여섯 명과 함께 강릉역 부근 인력시장으로 출근했다. 여름엔 농장에서 배추와 비료포대를 날랐고 겨울엔 공사장에서 눈을 치웠다. 시멘트를 섞어 나르기도 했고 페인트칠도 했다.

일주일간 일하면 50만 원 정도 받았다. 그걸로 유니폼 안에 입는 언더셔츠를 사고 오랜만에 돼지갈비를 원 없이 먹기도 했다.

○ 반쪽짜리 프로, 신고선수


2010년 8월 드래프트에서 떨어진 다음 날 LG구단에서 전화가 왔다. “신고선수로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신고선수란 구단으로부터 신인 지명을 받지 못했지만 함께 훈련하는 선수를 말한다. 계약금 없이 최저 연봉 2400만 원만 받는다. 정식으로 선수 등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반쪽짜리 선수로도 불린다. 10월에 미리 훈련에 합류했고 지난해 2월부터 급여를 받기 시작했다.

신고선수도 실력이 향상되면 나중에는 정식 선수로 등록할 수 있다. 대스타인 장종훈(한화코치) 김현수(두산)선배도 신고선수로 출발했다.

LG구단 숙소가 있는 경기 구리시로 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뭐라도 얻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지난해 4월 6일 두산과의 2군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처음 프로무대에 섰다. 5이닝 3실점했다. 7-3으로 경기는 이겼지만 마음은 급했다. 한 번이라도 부진하면 언제 유니폼을 벗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경기 때마다 어떻게든 강한 인상을 심어주려 무리한 투구를 했지만 어깨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러던 8월 부산에서 롯데와의 경기를 마치고 구리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차명석 투수코치로부터 “1군에 합류하라”는 말을 들었다. 꿈에 그리던 1군이었다.

1군 데뷔 무대 상대는 넥센이었다. 2-6으로 지고 있던 8회말 투 아웃 상황. 첫 타자 송지만 선배에게 안타를 내줬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기에 집중했다. 팀은 2-6으로 졌지만 이날 1과 3분의 1이닝 동안 2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두 번째 경기인 두산전에서 1이닝 동안 3실점하며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팀은 1-9로 졌다. 1군의 벽은 높았다.

지난 시즌 직후 경찰청 야구단 모집에 응시해 합격했다.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선 병역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걱정됐다. 첫 월급을 탄 날 어머니께 “이제 일 그만하셔도 된다”고 큰소리 쳤기에 더욱 죄송했다.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선수는 연봉을 25%밖에 받지 못한다.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마디마디가 퉁퉁 부은 손으로 다시 일을 나가야 한다.

○ 다시 찾은 인력시장

입대를 앞두고 지난해 11월 강릉에서 대학 후배들을 만났다. 지갑에 남은 돈은 8만 원. 서울∼강릉 왕복 버스비 2만8000원을 빼면 5만2000원뿐이어서 후배들에게 변변한 음식조차 사주지 못해 미안했다. 함께 연습을 하고 학교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가슴이 울컥했다.

일요일 이른 아침 강릉역 인력시장을 찾았다. 처음 만난 아저씨들과 승합차에 몸을 싣고 강릉 외곽 공사장으로 향했다. “젊은이는 학생인가 보네”라고 묻는 말에 씩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시멘트 찌꺼기를 치우는 일이 주어졌다. 일당 7만2000원을 받아 치킨 6마리를 사 들고 후배들 숙소를 찾았다. 치킨은 후배들의 환호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지난해 12월 29일 입대했다. 전역하면 2014년에 시즌을 맞는다. 경찰청에서 실력을 키워 프로 1군에 남는 게 목표다. 계약금을 받는 정식 선수가 돼 어머니 빚을 한 번에 갚아주고 싶다. 후배들에게도 당당하게 야식을 사주고 싶다. 신고선수라고 좌절하지 않는다. 나는 겨울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인동초이기에….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 #수신: 육군훈련소 23연대 5중대 3소대 63번 훈련병 최인영 앞 ▼


사랑하는 아들 인영아! 아직도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어엿한 군인이 됐구나. 그 모든 걸 참고 견디며 여기까지 와준 네가 대견하고 고맙다. 지난해 첫 월급날 “이제 일 그만 하세요”라고 전화했었지? 엄마는 네 통장을 가슴에 안으며 얼마나 떨리고 벅차던지.

어버이날에 경기 중인데도 선물까지 준비해 줬던 네 마음이 정말 예쁘게 느껴졌다. 신고 선수로 프로에 입단해 1군 무대에서 경기하는 너를 TV로 지켜보는데 한없이 고맙더구나. 그날도 엄마는 많이 울었단다.

어느 기자가 너에게 “야구를 왜 하느냐”고 물었지. “야구에는 기쁨, 슬픔도 있지만 희망도 있기에 한다”고 말하는 너를 보고 눈물이 앞을 가리더구나. 프로 입단할 때 집에 가져온 네 짐 속에 있던 일기장을 읽으며 그렇게 힘들었음에도 네가 내색 한 번 안 했음을 알았다.

부족한 엄마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와줘서 고맙다. 훈련소 생활 무사히 마치고 경찰청에서 운동하는 모습으로 만나자꾸나. 엄마도 이제는 밝게 웃으며 살아가마.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아들아! 사랑한다.

2012년 1월. 엄마 송연수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