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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신희섭]외상 후 스트레스와 공포기억 제거

입력 | 2012-01-04 03:00:00


신희섭 KIST 뇌과학연구소장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으로 같은 학교의 친했던 학생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한다. 가까웠던 친구의 자살로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리며 제대로 잠을 자지도 먹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일반적 성인의 40∼90%는 평생 적어도 한 번은 정신이나 신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큰 충격을 겪고 정신적인 상처(트라우마 또는 외상)를 입는다. 정신적 상처는 대부분 가족이나 주위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으로 점차 없어지게 된다. 하지만 10∼20%는 신경망에 큰 자국을 남기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게 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정신질환을 연구하면서 알려졌다. 전쟁의 위험은 줄어들었지만 극심한 정신적 충격은 더 자주 일어난다. 경제 위기와 성폭력, 학교나 군대의 폭력, 집단 따돌림, 인터넷상의 악성 댓글, 신상 털기 등 외상 후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현상들이 사회 모든 연령층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한 충격은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사람의 삶을 갉아 먹으며 일종의 사회병리 현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 그 사건에 대해 반복적이고 집요한 회상, 꿈, 재발할 것 같은 착각과 환각에 시달린다. 이런 증상이 한 달 이상 지속되면서 공격적 성향, 집중력 저하,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를 보이기 시작한다. 또 그 기억을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으로 해리 장애를 겪으며 약물 남용이나 알코올의존증으로 마음을 감옥에 가둬 대인관계를 어렵게 하고 무기력증으로 사회로부터 고립돼 간다.

마음속 빗장을 건 환자들을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료 방법으로는 충격적인 경험을 노출시켜 두려움이나 불안을 경감시키는 인지행동 치료, 한방치료, 최면요법이 증상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시도 중인 치료법으로 왜곡돼 저장된 기억을 재처리해 주어 좀 더 편안한 회상을 도와주는, 안구운동을 통한 탈감작화 및 재처리(EMDR) 등도 있다. 항우울제 계통의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지만 아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위한 정확한 약은 없다. 엄청난 외상적 사건이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남아 영향을 주는 전인적 질환으로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치료가 필요한 장애지만 생물학적 원인이 명확하지 않아 치료가 불완전한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려면 우선 신경과학적 기반으로 그 원인이 되는 뇌 부위들을 찾아야 한다. 각각의 뇌 부위가 어떻게 정보를 주고받는지 그 기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정보 전달과 관련된 유전자를 밝혀내 동물 모델을 만들고 작동 원리를 찾아 신약이나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과거의 일은 과거에 묻어 두게 하여 과거가 현재를 방해하지 않고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필자가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는 지난 5년간 이런 정보 전달 기전을 밝히기 위해 세포 간 정보 전달 시 발생하는 전기신호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 결과 ‘단발성 발화(신경세포 전기신호)’가 공포기억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네이처 인터넷판에 발표돼 세계 신경과학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는 신경과학적 기반으로 우리 머리 속에서 공포기억을 되살리는 기전을 알아낸 것으로, 실험실에서 밝혀진 원리를 토대로 신약과 치료법을 개발하려면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법이 상용화될 때까지 많은 사람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은둔의 시간을 보내야 하기에 우리 실험실은 오늘도 분주하다.

신희섭 KIST 뇌과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