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한 신라대 교수 “서열 2∼3위 ‘광둥호군사서 고문원’ 활약”
신해혁명 이후 광둥 혁명정부에서 고문원을 맡았을 당시의 김규흥. 고문원은 군부조직 서열 2, 3위에 해당한다. 배경한 교수 제공
신해혁명은 2000여 년 중국의 전제정치를 끝내며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제를 주창한 혁명이다. 김규흥의 혁명 가담은 중국 혁명파의 지원을 이끌어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김규흥의 행적을 발굴한 배경한 신라대 교수는 16일 “신해혁명 당시 지도부로 활약한 조선인은 지금까지 그가 유일하다”며 “대부분의 애국지사는 신해혁명 이후에 중국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했지만 김규흥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계획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1906년 말∼1907년 초 중국으로 망명해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에서 활동하며 중국 혁명파와의 교류, 한인 무관 양성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고 신해혁명에도 가담했다. 중국 망명 직후 조선의 국권 회복의 의미를 담아 이름도 김복(金復)으로 바꿨다.
1907년 말∼1908년 초 광둥으로 무대를 옮긴 그는 본격적인 혁명활동에 나섰다. 광둥 혁명활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추노(鄒魯)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규흥은 워낙 성실했기 때문에 비밀문건을 보관하거나 전달하는 것은 모두 그를 통할 정도였다.
이런 공로로 그는 광둥지역에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13년 초 광둥 호군사서(護軍使署) 고문원(顧問員)에 임명됐다. 군부 서열 2, 3위에 해당하는 자리다. 신해혁명에 가담한 이유에 대해 김규흥은 미주한인회에 보낸 1911년 3월 7일자 편지에서 “중국에서도 광둥은 가장 개화가 빠른 지역이고 왜적에 대한 증오도 깊은 지역이라 독립운동을 도모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판단해 수년째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규흥은 이후 독자적으로 활동하다 1936년 톈진(天津)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 교수는 “김규흥은 처음에는 고종의 밀명으로 중국으로 간 근왕적 인물이었지만 이후 공화제에 매료돼 혁명에 가담했다”며 “이는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상하이임시정부가 조국 광복 이후 국가의 형태를 공화국으로 상정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