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9월 17일을 ‘미국 분노의 날’로 정한 성난 젊은이들이 처음 겨눈 창끝은 세계 금융 중심지 월가의 탐욕스러운 금융인들의 ‘먹튀’와 돈잔치다. 이들은 그동안 일반인은 상상하기도 힘든 돈을 받으며 무책임한 파생상품, 부동산담보대출 등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해 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발뺌을 했다. 우리말로 하면 다해먹고 튄 셈이다. 당연히 소방수가 된 미 정부는 이 불을 끄느라 엄청난 돈을 퍼부었고 그 부담을 고스란히 선량한 미국 시민이 세금폭탄으로 껴안은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2008년 금융위기로 많은 미국인이 직장을 잃고 세금에 허덕이는데 책임감을 느껴야 할 월가는 반성은커녕 전해보다 20억 달러나 많은 200억 달러가 넘는 초호화판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금융위기 불러놓고 보너스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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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월가 못지않게 몰상식한 행동을 일삼는 워싱턴의 정치인들도 분노를 부채질하고 있다. 미 의회민주주의의 큰 미덕은 정치인들이 서로 싸우다가도 결정적 순간에는 국민을 위해 한발씩 물러서고 타협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화당과 민주당이 재정적자 해결 방법을 놓고 벼랑 끝 버티기를 하다가 8월 2일 미국을 국가부도 위기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다. 삼류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촌극이 세계 최고의 의회민주주의의 국가인 ‘USA’에서 벌어졌다.
이 혼란의 주역은 소위 말하는 ‘티파티(Tea Party)’ 출신의 공화당 내 초선 의원들이다. 2009년 세라 페일린 등이 주동한 티파티 운동은 지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켜 무려 40여 명이 하원에 들어갔다. 이들의 신념은 아주 단순하고 우직하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더는 세금 더 거둘 생각을 말라는 것이다. 이들의 고집불통은 워런 버핏이 말하는 ‘부자세(稅)’까지도 반대하는 데서 나타난다. 설득과 타협이라는 의회정치 게임의 룰을 전혀 모르는 정치 초년생인 이들은 하원의 10%를 장악하고 막무가내로 자기주장만 해 결국 8월 2일의 창피스러운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의회정치의 파행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사의 미 국채 신용등급 하향 조정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금융위기로 확산됐다.
미국發 시위 태평양 건너올 우려
미국판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불길이 쉽게 꺼질 것 같지 않다. 젊은이들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중산층이 동조하기 시작하며 튀어나오는 구호도 ‘청년실업’ ‘양극화’ ‘세금폭탄’ 등 다양해지고 있다. 미국에서 평범한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이후 반세기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더욱이 이들의 분노가 9·11테러같이 외부적 충격이나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닌 미국을 떠받치는 큰 기둥인 의회민주주의와 월가 금융시스템의 오작동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더욱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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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무상급식, 지역개발 등을 놓고 극한 대립을 일삼는 정치권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미국에서 정치권이 매도당하는 것은 위기 그 자체가 아니라 의회정치가 위기를 관리할 수 없다는 불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극으로만 치닫다가 국민이 기존 정당정치에 실망하면 내년 총선에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안세영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syahn@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