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후보 단일화 거래 고발만 기다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이들 가운데 선관위원장의 이름과 얼굴을 상대적으로 가장 모른다. 청와대 행사나 국가 경축일에 5부 요인이 한데 모였다는 뉴스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접할 정도다. 그래도 그 자리의 위상을 결코 저평가할 수는 없다. 선출직 권력의 합법적 진퇴에 차질이 없도록 소리 없이 만전을 기하는 것은 선관위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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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선관위의 역할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가령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빌미가 된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의 경우, 무상급식 전면실시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선거 자체를 ‘나쁜 투표’로 규정하고 원천적으로 거부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이를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하긴 2005년 행정구역 개편안을 놓고 실시된 제주도 주민투표 당시 선관위는 불참운동도 선거운동의 하나라고 유권해석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때 이미 선거 주무기관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기미가 있다. 게다가 올해 8월에 실시된 서울시 주민투표는 선관위가 방치한 조직적인 반(反)투표 운동에 의해 ‘공개선거’ 혹은 ‘흑백투표’로 진행된 측면도 없지 않다.
후보자 매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경우도 선관위의 존립목적과 관련하여 적잖이 심각한 사안이다. 언제부턴가 ‘후보 단일화’는 선거 때마다 하나의 정형(定型)으로 굳어가는 추세다. 예컨대 2010년 6·2지방선거 때 후보등록 이후 사퇴한 사람은 87명이었다. 곽노현 사건이 터진 후 선관위 관계자는 이와 유사한 후보 사퇴 과정에 거래가 있을 개연성이 있다고 언급했는데 답답한 것은 “다만 내부고발자가 없으면 적발이 어렵다”는 부언(附言)이다. 이해는 가지만 민의를 왜곡당한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꽤 무책임한 발언이다.
北이 개입해도 방법이 없다니
생각해 보면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일부 시민단체가 벌인 낙천·낙선운동부터 전조(前兆)가 불길했다. 선거법 위반으로 지도부가 법정에 서고 특정 행위에 한해서만 합법성을 인정한 것은 모두 선거가 끝난 이후의 일로, 막상 선거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은 낙천·낙선운동의 영향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했다. 선관위의 조처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었던 셈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런저런 사태가 계속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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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항간에는 10·26선거를 목전에 두고 서울시 전입자가 갑자기 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보궐 지방선거에서 ‘발로 뛰는 투표(vote by feet)’가 실제 상황이라면 그 효과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내년부터 도입될 재외국민투표를 앞두고 총련계 재일동포 5만여 명이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는 얘기도 나돈다. 이에 대해 선관위 담당자는 사상의 자유를 감안하면 “북한 당국이 내년 선거에 개입하려 해도 차단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딴 나라 공무원처럼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명령인 대의민주주의의 구현과 정당정치의 정착을 위해 중앙선관위의 각성과 분발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실증법을 넘나드는 각종 기발한 선거실험이 일반 유권자의 순수한 참정권을 훼손하거나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취약점을 뚫고 국가 정체성이 위협당하는 사태는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관리하는 헌법기관의 자부심과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일이다. 선관위는 헌법과 민의를 지켜야 한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sangi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