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 ‘꼭두각시 서커스’ 중에서 》
간만에 이른 퇴근. 와이프께서 ‘음식물쓰레기 처리’ 명을 내렸다. 두 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나선 아파트 단지. 해질녘 벤치에 앉은 웬 노인과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딱 봐도 손녀인 아이는 무릎 위에서 재롱이 한창. 어르신 눈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 순간 뜬금없이, 아이가 마구 졸라댄다.
“할부지, 노래 불러줘. 노래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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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놀다 두우고 온 나뭇잎 배는….”
음정은 엉망, 떨긴 얼마나 떠시는지. 헌데 그 노래, 왜 그리 듣기 좋을까. 여전히 딱한 얼굴인데 멈추진 않으신다. 장단 맞춰 다릴 까딱거리는 아이는 어찌나 어여쁜지. 가슴 한 구석 따끈해지는데, 아이가 한마디 했다.
“근데, 할부지. 저 아저씨 이상한 냄새 나.”
젠장, 난 이래서 꼬마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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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가만히 당하진 않는다. 비밀 인형술사 집단 ‘시로가네’를 조직해 대항한다. 인형을 조종해 인형과 대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 와중에 남을 웃겨야만 사는 이상한 병에 걸린 한 남자와 웃는 법을 잊어버린 한 여자가 가족에게 버림받은 한 소년을 지키려 혈투를 벌인다….
사실 이 작품, 만화래도 억지스러운 데가 많다. SF도 아니고 중세에 만든 ‘완전체’ 인형이라니. 차라리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자연스럽다. 게다가 초등학생 꼬마가 인류의 재앙을 온몸으로 막아내다니. 뭐, ‘로버트 태권V’의 훈이도 10대이긴 하지만.
허나 그 황당 설정만 받아들인다면, 작품에서 상당한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일단 짜임새가 쫀쫀하다. 43권이나 되는 장편이지만 뻔하게 흘러가질 않는다. 센 놈 처치하면 더 센 놈이 나오는 일본만화 특유의 ‘토너먼트 식’ 전개가 없다. 초반 마구잡이로 튀던 에피소드들이 후반에 다 이유 있는 복선이 되는 디테일도 살아있다. 악당은 물론 작은 단역조차 ‘뒷얘기’를 지닌 입체감 있는 캐릭터인 점도 매력적이다.
뭣보다 이 만화는 독자에게 던진 주제의식을 끈기 있게 밀어붙인다. ‘인간이 인형보다 나은 점은 과연 무엇인가.’ 아니, 낫다는 자만은 뭘 근거로 하나. 지능을 가졌단 이유로 다른 모든 생물체를 맘대로 주무를 권리가 인간에게 있는가. 힘의 논리대로라면 훨씬 강력한 인형이 세상을 지배해선 안 될 이유가 없다. 작가는 가상의 인형이란 대상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되묻는다. 그리고 그 해답을 인간의 ‘관계’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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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건 치기어린 발상일 수도 있다. 세상은 그리 단순치 않으니까. 다만 한번쯤 떠올려보자. 무엇이 그 할아버지가 노상에서 노래하는 부끄러움을 잊게 했을까. 무엇이 그 풍경을 아름답게 만들었던가. 사람은 ‘관계’ 속에서 숨을 쉰다. 너무 자주 까먹어서 탈이지만.
ray@donga.com
레이 동아일보 소속. 처음에 ‘그냥 기자’라고 썼다가 O2 팀에 성의 없다고 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