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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다, 정치코미디

입력 | 2011-09-20 03:00:00

폭탄터지기 직전에도 ‘담화’… 테러범 “지겨워 자수”
총선-대선 앞두고 방송-공연계 개그 소재로 각광




KBS2 개그콘서트 ‘비상대책위원회’.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협박한 시간이 1분 남았다. 비상대책위원들이 시계를 보며채근하지만 대통령은 범인에 대한 담화를 읽느라 바쁘다. 듣다 못한 범인은 차라리 자수를 택한다. KBS TV 화면 촬영

테러리스트가 10분 안에 현금 10억 원을 가져오지 않으면 주요 시설을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급박한 상황. 군경 간부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는 가운데 대통령이 등장한다. 특수부대원은 “시간이 없습니다. 1분 남았습니다”라고 보고하지만 대통령은 느긋하기만 하다.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덕담을 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부른 뒤엔 테이프 커팅을 하고 경찰특공대와 태권도시범단의 시범을 보느라 금쪽같은 시간을 흘려보낸다.

마침내 시작된 대통령의 담화문 발표. “범인 여러분, 국제유가 상승으로 물가는 치솟고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과 유럽 재정 위기 속에….” 지겨운 연설에 못 이겨 자수하겠다고 나선 범인. 하지만 경찰 간부가 말린다. “대통령 말씀 다 듣고 자수해!”(KBS2 개그콘서트 ‘비상대책위원회’)

고인이 된 개그맨 김형곤이 기업 회장으로 나와 정계를 풍자했던 ‘회장님 회장님’ 이후 한국에서는 정치 코미디를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방송과 공연계에서는 정치 코미디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사람들은 “쓴 웃음이라도 내뱉게 만든다”(정남현 씨) “대한민국을 통째로 뒤엎는 설정이 상쾌 통쾌 시원하다”(김용규 씨)며 반기고 있다.

개그맨 박준형이 9일부터 서울 대학로 무대에 올린 개그 공연 ‘좌파 우파 양파’는 목사와 승려가 등장해 “절에 오시면 동자승들이 아이들과 놀아주는 무상보육을 실현하겠다” “예수를 믿으면 반값아파트를 제공하겠다”며 포퓰리즘 공약경쟁을 벌인다. “곽노현 교육감이 줬다는 2억 원은 어디서 난 돈일까요”라는 퀴즈 문제에 “○○○캐시”라는 답이 돌아온다. 선거철마다 재래시장에 나타나는 정치인에게 하는 올바른 인사말을 묻는 문제의 정답은 “꺼져”다. 공연의 일부는 tvN 코미디 서바이벌 프로그램 ‘코미디 빅 리그’를 통해 방송한다. 박준형은 “그동안 방송에서 정치 개그를 하면 특정 편에 섰다는 공격을 받기 쉬워 시사 개그 이상의 정치 개그를 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개그작가 장덕균 씨는 “김형곤 씨 이후로도 대통령 아들을 소재로 한 코미디가 나왔지만 방송사 간부진이 불편해하면서 오래가지 못했다”며 정치 코미디가 고개를 드는 이유를 “정치 개그에 대한 사회적 수용의 폭이 넓어진 가운데 정권 말기로 가면서 코미디 소재로 삼을 만한 여러 사건이 터지고 있고,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개그 프로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소재가 필요해져 ‘정치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금기가 깨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방송계의 개그 프로는 개콘이 독주하는 가운데 개콘의 김석현 PD가 CJ E&M으로 이적해 만든 ‘코미디 빅 리그’가 17일 방송을 시작했고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도 다음 달쯤 방송을 재개할 예정이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