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이야기숲학교 교장
수년 전부터 경기 화성시 바닷가에 있는 나의 집 뒷동산의 오리나무들은 계속되는 수난에 시달렸다. 1970년대 폐허가 된 한국의 민둥산을 살리는 사방용(砂防用) 수종으로 선택된 오리나무는 아까시나무와 함께 한국 산을 비옥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까시나무와 오리나무는 새롭게 심어진 잣나무림, 소나무림 등에 밀려 잡목 신세로 전락했다. 뒷동산의 그 많던 오리나무도 잡목 제거 사업에 걸려 참혹하게 도륙을 당했다. 잡목이라니, 오리나무의 입장에서는 듣기에 원통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의 세상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여 건강한 사회를 이루듯 나무도 활엽수 침엽수가 골고루 어울려야 건강한 숲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오리나무는 인간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몇 차례나 수난을 당했다. ‘잡목’이라는 차별 대우로 잘려 나갔을 뿐만 아니라 이웃 산주가 제시한 지적등본에 수목갱신사업지로 편입돼 불운을 당하기도 했다. 인간보다 이 지구상에 수억 년을 먼저 자리 잡고 살아온 나무의 오래된 불문적 권리장전은 자기들 멋대로 그어온 종이금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됐다. 이 살육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몸을 지킨 뒷동산 오리나무 수십 그루마저 올여름 벌레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당한 것이다.
민둥산을 비옥하게 만든 일등공신
신록이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5, 6월. 추운 겨울을 낙엽 속에서 견뎌낸 오리나무 잎벌레들이 가지를 타고 오를 때부터 오리나무 숲은 육감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와 긴장에 떨었다. 6mm 안팎의 광택이 나는 이 작은 남색 벌레는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파리 뒷면에 무수한 덩어리로 수천 개의 노란색 알을 산란했다. 그 알이 부화하면서부터 나뭇잎은 유충들의 식량창고가 됐다. 잎이 없으면 광합성을 못하는 나무와 잎을 갉아먹어야 삶이 유지되는 벌레의 생존을 건 사투에서 식물인 나무는 언제나 약자의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드디어 7, 8월 오리나무숲은 번데기에서 우화한 성충으로 가득하고 새까맣게 잔등을 드러낸 채 이파리를 갉아대는 벌레들의 매몰찬 공격 앞에 희생물이 된다. 새순 옛순 가리지 않고 벌레 먹은 것처럼 초토화되던 잎들은 희뿌연 뼈대를 드리운 채 하나둘 삶을 포기하며 낙엽이 되어 사라져갔다. 그런데 죽었다고 믿었던 오리나무가 다시 살아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영민한 나무에 ‘식물인간’이라니
숲 속에서 오리나무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시간도 바로 이 순간이다. 모자란 광합성을 보충하기 위한 오리나무의 사투는 눈물겹다. 때로는 햇살을 받는 면적을 넓히기 위해 두 배나 큰 잎을 내기도 하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양분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겨울잠 자는 시간도 최대한 늦춘다. 혹자는 추운 겨울날 산속 앙상한 나목들 사이에서 짙푸른 잎사귀를 매단 채 몸을 떨며 햇빛 모으기에 열중하고 있는 나무들을 기억하리라. 그리하여 뒷동산의 오리나무는 올여름 유난히 극성이었던 벌레의 폭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긴 겨울의 터널을 뚫고나와 내년 생명의 숲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뒷동산의 영민한 오리나무가 이런 오만무도한 인간의 말을 듣는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이야기숲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