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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가야 멀리 간다/대기업-中企 동반성장]납품가 조정 합리적으로

입력 | 2011-08-15 03:00:00

컨설팅 해준다며 경영자료 싹 훑더니 “단가 깎자” 뒤통수 쳐




▼ 이런 현실

11일 경기 부천시 테크노힐 본사에서 박익균 대표(왼쪽)가 자사(自社)가 만든 휴대전화용 배터리팩을 살펴보고 있다. 이 회사는 원청업체인 LG전자 및 2차 협력사인 ITM과 함께 원가 절감을 위한 공정기술을 개발해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등 성과를 공유했다. 부천=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중소도시에서 10년 넘게 자동차부품 공장을 운영하던 박모 씨(61)는 지난해 금융채무 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가 된 채 경영자 인생을 마감했다. 대기업 1차 협력업체에 머플러 등을 납품하던 2차 협력업체 사장인 박 씨는 2008년 이후 철판과 코일 등 원자재 가격이 두세 배씩 뛰는데도 분기당 3∼7%의 단가인하 요구를 받는 바람에 ‘적자 인생’으로 접어들었다. “물량을 늘리면 단가를 잘 쳐주겠다”는 대기업 1차 협력업체 담당자 말에 공장을 담보로 2억 원을 빌려 설비를 늘린 박 씨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납품단가와 이자 부담으로 공장을 압류당하고 말았다.

대기업이 자사(自社)의 필요에 따라 협력사에 해외 동반 진출을 도운 뒤 나중에 납품단가 인하로 ‘자금 회수’에 들어가는 사례들도 있다. “우리가 해외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데 시설투자비 일부를 지원해 줄테니 인근에 부품공장을 지어달라”고 한 뒤 협력업체가 해외에서 자리를 잡으면 지원 대가로 납품단가를 깎는 식이다.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특히 심한 자동차, 전자, 유통 관련 중소기업들은 납품단가를 결정할 시기가 되면 경영명세 자료를 들춰보며 일방적으로 인하 비율을 통보하고, 구두로는 시도 때도 없이 인하를 강요한다고 입을 모았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대형마트 거래업체의 44%가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기업이 1차 협력업체에 단가 인하를 요구하면 2차, 3차 협력업체에는 더 높은 비율의 ‘후려치기’가 돌아온다는 게 영세한 중소기업들의 하소연이다. 지난해 중기중앙회가 실시한 납품단가 결정방식 조사에서 중소기업의 38.9%는 ‘협의 기회는 주어졌으나 불충분하다’, 34.7%는 ‘아예 협의 기회가 없다’고 답했다. 한 전자부품업체 대표는 “대기업은 비용절감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경영자료를 요구한 뒤 이 명세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납품단가를 깎거나 복수입찰로 경쟁을 시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중소기업을 괴롭히는데 정부 대책은 여전히 미미하다”고 지적했다.
▼ 이런 대안
“단가조정 고민 LG 구매팀 원가절감 지원 연합군으로”

지난해 1월 서울 금천구 가산동 LG전자 MC(휴대전화)사업본부 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원가 절감(CR·Cost Reduction)’을 주제로 LG전자와 협력업체 관계자들 사이에 회의가 열린 것. 중소기업들 사이에서 약칭으로 ‘CR’라고 불리는 납품단가 조정은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CR 정도에 따라 협력사의 한 해 수익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원래 한국 대기업의 CR란 구매팀이 먼저 협력사의 장부를 들여다본 뒤 적정 이윤을 산정해 ‘올해는 몇 % 단가 인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과도한 CR를 못 버티고 끝내 무너지는 협력사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이날 회의는 달랐다. LG전자 구매팀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합리적인 CR를 서로 모색해 보자”고 했다. 회의에 참석한 1차 협력사 테크노힐 실무자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돌았다. 원가절감을 향한 양측의 파트너십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 대·중소기업 함께 사는 단가 조정

“일방적으로 가격을 후려치는 게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공정기술을 개발해 CR를 이뤄냈다는 점이 참 신선했습니다.”

11일 경기 부천시 테크노힐 본사에서 만난 박익균 대표는 지난 1년간의 CR 프로젝트를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LG전자는 지난해 1월 협력사 회의를 마치자마자 휴대전화용 배터리팩 1차 협력사인 테크노힐과 이곳에 배터리칩을 납품하는 2차 협력사 ITM 개발자들을 불러 모았다. 배터리에 과전류가 흐를 때 이를 자동으로 차단하는 보호회로(PCM)의 생산공정을 잘 바꿔보면 원가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애플, 노키아 등과 맞서 싸워야 하는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에서 단 1원이라도 원가를 줄이는 것은 생존의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LG전자 혼자서 모든 걸 다할 순 없었다. PCM에 들어가는 작은 칩을 만드는 ITM부터 이를 납품받아 배터리팩으로 조립하는 테크노힐까지 협력업체 엔지니어들의 협조가 필수였다. 삼자가 모여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이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의 원가절감 방안을 찾아냈다.

PCM에 들어가는 칩 두 개를 하나의 칩으로 합쳐 재료비를 줄이는 한편 회로에 쓰이는 도선(와이어 본딩) 소재를 가격이 비싼 금에서 구리로 바꾸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 구매력이 높은 LG전자가 나서 좀 더 낮은 가격으로 기판(웨이퍼)을 공급하는 거래처를 협력사들과 연결해줬다. 이를 통해 LG전자와 협력사들은 연간 20억 원의 원가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대기업과 협력사가 피땀을 흘려 거둔 원가절감의 과실을 공평하게 나누는 절차였다. CR 논의가 시작된 지 1년 만에 테크노힐은 개당 740원을 주고 사와야 했던 PCM 값을 710원으로 낮출 수 있었다. 개당 30원의 원가절감 요인이 발생했다.

하지만 LG전자는 이를 CR에 모두 반영하지 않고 납품가격을 개당 20원만 내렸다. 테크노힐로선 개당 10원의 단가 마진이 새로 생긴 셈이다. 지난해 테크노힐이 3000만 개의 배터리팩을 LG전자에 납품한 것을 감안하면 3억 원의 추가 이윤이 생긴 것. 마찬가지로 테크노힐도 2차 협력사에 추가 이윤의 절반인 1억5000만 원을 나눠줬다. 박 대표는 “LG와 협력사들이 1년간 고생한 원가절감의 과실이 합리적인 CR로 돌아왔다”며 “이제는 원청업체의 CR를 막연히 두려워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다.

○ 대기업, 구매 협상 지원군으로

“가격을 너무 세게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와 거래관계를 생각해서라도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LG전자 관계자)

“귀사가 신경을 쓰는 기업인 만큼 합리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소니 관계자)

지난해 테크노힐이 배터리셀을 공급받는 일본 소니 관계자들과 만난 가격 협상장에는 난데없이 LG전자 실무자가 함께 배석했다. 직접 구매 관계에 있지 않은 제3자가 협상장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가격 결정력이 떨어지는 협력사를 대신해 LG전자가 직접 구매협상에 힘을 보탠 것이었다. 박 대표는 “소니 제품을 구매하는 LG전자 임직원이 발언을 하면 약발이 먹힐 수밖에 없다”며 “덕분에 소니 배터리셀을 예상보다 낮은 가격에 살 수 있었다”고 전했다.

○ 日에선 유지보수비도 납품가로 인정

“해외에서 유지보수비를 이 정도까지 챙겨주니 더 놀랍고 고마웠습니다.”

통신 소프트웨어 업체인 엔텔스는 최근 일본 2위 통신사인 KDDI와 납품 계약을 하면서 유지보수비를 납품가의 20%까지 보장받았다. 유지보수비를 아예 못 받거나 많이 받아야 최대 10%를 인정해주는 다른 국내 기업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게다가 무상 유지보수 기간도 보통 3년을 요구하는 다른 기업보다 훨씬 짧은 1년에 그쳤다. KDDI 측은 “일본에선 유지보수 비용도 납품가로 인정해주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엔텔스 관계자는 “소프트웨어 업종의 특성상 유지보수를 해줘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국내에서 무상으로 3년간 유지보수를 해주느라 등골이 휘는 주변 업체들을 보면 KDDI 측에 더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 상생위원회 평가 ▼
日 도요타처럼 납품단가 인하 미리 알려 충격 줄여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원가절감은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잘못된 방법이다.”

동아일보 상생위원회 위원들은 ‘납품단가 후려치기’로 통하는 한국식 단가 조정방식의 문제점을 이렇게 진단했다. 협력사들이 사전에 예측 가능한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대기업이 원가절감 계획을 미리 밝히고 그대로 이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협력사들에 ‘2013년까지 단계적으로 납품가 30% 절감’ 목표를 밝힌 일본의 자동차업체 도요타처럼 구체적인 단가인하 시기와 폭을 협력업체들에 미리 알리는 게 중요하다.

송창석 위원(숭실대 교수)은 “외부 경영여건에 따라 원가를 조절할 필요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며 “하지만 우리나라 대기업은 예고 없이 무리한 단가인하를 실시해 중소기업 경영에 압박을 주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대·중소기업이 원가절감을 통해 거둔 과실을 대기업이 독점하는 것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주현 위원(산업연구원 중소·벤처기업연구실장)은 “원가절감의 혜택을 협력사들과 공정하게 나누지 않으면 중소기업들이 원가절감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유인이 사라진다”며 “이는 결국 대기업에도 손해”라고 분석했다.

이런 측면에서 본보 상생위원들은 테크노힐(1차 협력사)과 ITM(2차 협력사), LG전자가 함께 공정기술 개발로 얻은 성과를 납품단가에 반영한 것은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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