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시작 제공
시집이 나온 뒤 최 시인은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왔다. “책이 나왔다면서요. 웬만하면 고마운 분들을 뵙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여건이 그렇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공중전화의 동전이 떨어지며 ‘쨍강’ 소리를 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는 모두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졌다. 극심한 불면증,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갑자기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는 고통 속에서도 시인은 펜을 놓지 않았다. 노트에 검은색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시 60편이 모이자 출판사에 우편으로 원고를 보냈다. 키 149cm, 몸무게 34kg의 시인이 온몸의 기력을 모아 짜낸 글들이다.
1980, 90년대 ‘스타 시인’이었던 그는 90년대 후반 정신이 쇠약해지며 병마에 시달렸다. 한동안 시집을 내지 못했고 소주와 줄담배에 의탁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 그는 11년 만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냈고 그해 등단 31년 만에 자신의 첫 문학상이 된 지리산문학상에 이어 대산문학상도 받았다.
지난해 겨울 대산문학상 시상식이 끝나고 포항으로 내려가는 시인을 배웅한 문학평론가 황현산 씨는 시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슬며시 거둬들였다. “허공에 뜬 가랑잎을 쥐는 것 같아 힘주어 붙잡을 수 없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인 것만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머지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죽음을 말한다/뒤에서 우리의 존재를 든든히 받쳐주는 그림자인 것 마냥/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환각제인 것 마냥/…/잊어라 잊어라/죽음의 문명을//어느 날 구름 한 점씩/새로이 피어나는 날들을 위하여.’(시 ‘20세기의 무덤 앞에’에서)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