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영환은 부채에 “한나라 고조가 승리하고 항우가 패배한 까닭은, 인(忍)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있을 뿐이었다”로 시작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제공
○ 부채를 선물하는 문화
서양인에게는 이색적이겠지만 동아시아인들에게 부채는 멋이 깃든 물건이다. 부채춤에서 볼 수 있듯이 부채는 흔희 실용을 넘어 예술로 도약한다. 또한 부채는 마음을 전하는 소중한 선물로 애용돼 왔다.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부채를 시원한 바람과 함께 선사했던 풍속이 그러하다.
조선은 어떠했을까?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단오절에 맞춰 부채를 진상하는 것이 관례였던 듯하다. 임금은 이 부채를 받아 궁인들에게 나누어주거나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데 썼다. 정약용은 정조가 하사한 부용선(芙蓉扇·연꽃을 그린 부채)을 받은 적이 있는데, 부채에 그려진 그림은 김홍도가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국상 중에는 고운 그림 부채를 쓰지 못하게 하고 대신 상복처럼 흰 부채를 사용하게 했다. 어떤 때는 진상품 부채 저장 창고에 불이 나서 5만 개가 재로 변한 적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운송 도중에 도적 떼에게 물건을 탈취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조정에서는 대책을 마련하느라 논의가 분분했다고 한다.
○ 신정하와 이언진이 겪은 해프닝
무엇보다 부채가 각광받았던 이유는 그것이 예술품으로 승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인의 솜씨가 덧보태어진 부채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소장품이 되곤 했다. 18세기의 문인 신정하(申靖夏)가 조카에게 써준 편지에 우스운 해프닝 하나가 소개돼 있다. 식사 후 노곤한 그에게 어느 날 석강이라는 ‘놈’이 부채 하나를 들고 찾아왔다. 이 자는 노름에 빠져 노모를 속상하게 한 불효자였다. 그는 글씨도 못 읽는 주제에 부채에다 초서로 시를 한 수 써 달라 청했다. 신정하는 마지못해 이렇게 써 주었다.
18세기 역관 이언진이 겪은 일화도 재미있다. 1763년 통신사의 일원이었던 그가 일본 앞바다의 배 위에 있을 때다. 홀연 일본인들이 찾아와 매달리며 부채 500자루를 내놓고 시를 재촉했다. 당시 24세의 이언진은 즉석에서 오언율시(五言律詩) 500수를 지어주었다. 찬탄과 경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잠시 후 일본인들은 다시 부채 500자루를 싣고 왔다. 그러곤 “시 짓는 능력은 알겠으나 기억력은 어떠한지 궁금하다”는게 아닌가! 태연히 아까의 그 500수를 다시 써 준 뒤, 이언진은 희대의 천재로 기억됐다.
○ 부채를 아끼는 또 다른 연유
동아일보 DB
조선의 유학자 강재항(姜再恒)은 둥근 부채에 이렇게 ‘단선명(團扇銘)’을 썼다.
조물주처럼 청풍과 명월을 손바닥 안에 담았다 했으니 그 기상이 시원하고 호쾌하다.
반면 다산 정약용은 접부채에 다음과 같이 ‘접첩선명(摺疊扇銘)’을 적었다. “꽉 차고 꽉 찬 것이 공기라, 움직이게 하면 바람이 된다. 움직일 힘을 지녔으되 접혀 있으니, 고요히 바람을 간직하고 있구나(盈盈者氣 動之則爲風 有動之之才而卷而懷之 寂然而風在其中)”라 했다. 대붕(大鵬)의 웅지를 접힌 부채에 투사한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의 재상 이규보는 단선명에다 ‘부른 것도 애원한 것도 아닌데, 시원한 바람이 절로 오누나. 가마처럼 끓는 이 세상을, 맑은 바람으로 씻기고 싶다’고 갈구했다.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의 부채답다.
더위가 지나고 가을이 오면 부채는 쓸쓸해진다. 선인들은 상자 속으로 들어갈 가을의 부채, 곧 추선(秋扇)의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후텁지근하고 지루한 여름은 오고 또 오리라.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부채를 찾게 될 것이다. 자동차도 좋지만 자전거의 멋이 또 다르듯, 부채에는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따라잡을 수 없는 멋이 있다. 리처드 기어도 부채가 품고 있는 멋을 음미하고 있을까.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djk2146@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