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불교의 ‘온화한 미소’ 되살리자”
《경주 남산이 ‘승리한 불교’의 정사(正史)라면, 내포 가야산은 ‘패배한 불교’의 야사(野史)다. 그래서 경주 남산의 신라 부처님들은 수려하고 귀족적인 모습이고, 내포 가야산의 백제 부처님들은 소박하고 서민적인 용모다. 한국 불교계가 역사의 그늘에 묻힌 내포 가야산의 성역화 작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한국 근대 선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경허 만공 스님의 법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덕숭총림 수덕사와 조계종 본산인 서울 조계사가 중심에 섰다. 문중을 달리하는 서울과 지방 사찰이 한마음으로 불사를 추진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내포는 충남 가야산(해발 678m)을 중심으로 오늘의 충남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당진 아산 등을 아우르는 열 개 고을을 의미한다. 포구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고대문물이 한반도에 들어오던 유입지로서 공주와 부여뿐만 아니라 신라 경주, 나아가 일본에까지 문물을 전파한 전래지였다. 무엇보다 이곳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가야사 개심사 수덕사 보원사 등 4개 중심 사찰을 비롯해 100여 개의 사찰이 있었던 한국 불교의 젖줄이었다. 불교 전성기에 조성된 서산과 태안의 마애삼존불과 백제시대 유일의 사면불 등 고대미술의 걸작 조형물들이 오늘도 순례자를 맞고 있다. 지난달 28일 충남 예산 덕산도립공원 입구 남연군 묘소. 하안거 중 반(半)결제 날을 맞아 딱 하루 선방을 나선 비구 비구니 200여 명과 조계사 호압사 미타사 옥천암 화계사, 춘천 정법사 및 수덕사 본·말사에서 온 신도 등 700여 명이 모였다.》
내포 가야산 성역화 불사의 핵심인 보원사지. 한때 승려 1000명 등 3000여 명의 대중이 모여살던 대가람이지만 폐사지의 정적과 고요만이 감돈다. 예산·서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내포 가야산 성역화 사업을 이끄는 세 스님이 서산마애삼존불의 ‘백제 미소’ 앞에서 결의를 다지고 있다. 가운데가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 왼쪽이 수덕사 주지 지운 스님, 오른쪽이 조계사 주지 토진 스님.
황현이 쓴 ‘매천야록’ 등에 따르면 이하응이 ‘상갓집 개’처럼 지내던 시절 지관 정만인이 찾아와 덕산 땅에 ‘자손만대 영화를 누리는 자리’와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자리’가 있으니 둘 중 한 곳에 부친의 묘소를 쓰라고 했다. 왕권 회복의 야심에 불타 있던 이하응은 망설임없이 후자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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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를 옮긴 지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고, 그가 12세에 왕이 되었다. 그가 고종이고, 아들 순종을 끝으로 조선왕조가 막을 내렸으니 과연 2대에 걸쳐 왕이 나온 셈이다. 그 와중에 대원군은 며느리와의 권력 다툼으로 실각하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멀쩡한 절을 불태웠으니 부처님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이 무덤을 파헤치려다 미수에 그쳐 대원군을 분노하게 했고, 이는 쇄국과 천주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행사를 마친 스님과 신도들은 폭염 속에 가야사터에서 보원사터에 이르는 산길 5km를 걷는 ‘백제 미소길 걷기 행사’를 하면서 결의를 다졌다. 예산과 서산을 연결하는 이 길은 가야산을 관통하는 도로로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불교계가 저지했고 현재 ‘백제 미소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친환경 생태도로로 조성 중이다. 인근 주민들은 도로 건설이 저지된 것에 대해 실망과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내포 가야산 성역화 사업의 핵심은 이 일대 최대 사찰이었던 보원사 복원과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관리권 이양에 맞춰지고 있다. 불교계는 장기적으로는 내포 가야산 일대의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 등재를 추진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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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사적 제316호로 지정됐으며 수덕사주지와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법장 스님이 약간의 땅을 매입해 수덕사 말사인 보원사를 지어 스님이 상주하도록 했다. 현재는 가건물 수준이다. 불교계는 문화재청, 서산시 등과 협의해 보원사의 복원 불사를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예산 가야사를 불태운 뒤 금탑 자리에 조성한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 무덤 바로 앞에 커다란 너럭바위들이 떡 버티고 있어 거센 기운이 느껴진다.
폭염에도 등산화 차림으로 내내 행렬을 이끈 설정 방장 스님은 인사말 도중 몇 차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수덕사 주지 지운 스님은 “우선 불교계가 아침과 저녁 예불이라도 제대로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절에서 마애삼존불의 관리와 운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계사 주지 토진 스님은 “부처님은 절에 계시고, 공무원이 아니라 스님과 신도들이 모셔야 한다”고 거들었다. 행사를 마친 참석자들의 얼굴에 자애로운 ‘백제의 미소’가 번져 나갔다.
예산·서산=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