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문화부 차장
SM 소속인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샤이니 소녀시대 f(x)의 파리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자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서구까지 휩쓸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케이팝의 유럽 침공’이라는 승전보를 가져다준 전사들 31명의 평균 나이는 22.5세다. 이들은 18세에 데뷔한 지 4년 반 만에 한국 대중문화사에 기록될 인물이 됐다.
케이팝이 세계 무대에서 눈부신 조명을 받는 시기에 무대 뒤 아이돌의 적나라한 실상을 들춘 공포 영화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가 개봉한 것은 아이러니다. ‘연예계 영재를 조기 발굴해 글로벌 아티스트로 키워낸다’는 기획사 시스템은 케이팝 한류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하지만 영화 속 ‘영재’들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태엽을 감아준 만큼 움직이는 기계인형 같다. ‘핑크돌즈’라 불리는 이 인형들은 정규 교육에서 배제된 채 ‘노예’ 계약서에 묶여 한약을 먹어가며 빽빽한 일정을 소화한다. 성형 중독으로 얼굴이 망가지고, 스폰서 접대에 마음이 무너진다. 무시로 인형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기획사 대표 이름이 하필 ‘최수만’이다.
그동안 한류 담론은 ‘상품’이라는 키워드에 집중돼 왔다. 대중가요는 ‘케이팝 인더스트리’, 아이돌 가수는 ‘수출 역군’으로 불린다. 아이돌을 상품으로만 보니 이들의 인권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케이팝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때 ‘소년 소녀를 상품화해 한류라는 이름으로 수출한다’ ‘산업적 측면만 부각되는 건 경계해야 한다’는 외부인의 경고음은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3∼7년 후 바뀔 외모와 목소리까지 시뮬레이션해 인재를 발굴한다”는 이수만 SM 회장의 과학적 전략이 중요하듯 “인성을 갖추지 않은 스타는 대중을 이끌 수 없다”며 소속사 가수들에게 인성교육, 성교육에 봉사활동까지 시키는 홍승성 큐브 대표의 교육적 배려도 박수받아야 한다.
지속 가능한 한류 전략을 논의하는 동시에 어린 가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대책 마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여고생 설리가 다음번 출장길엔 화장품과 함께 학교 과제물도 챙겨 가길 바란다. 그래야 한류도 오래가고 ‘케이팝이 문화 선진국의 자존심에 일격을 가했다’는 자화자찬에도 낯간지럽지 않을 수 있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