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연출★★★★ 무대★★★★ 연기★★★☆ 대본★★★☆
불도(佛道)와 다도(茶道)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이 남긴 상흔을 씻어내는 연극 ‘푸르른 날에’는 이질적 요소들이 충돌을 빚어내며 뜻밖의 화음을 들려준다. 신시컴퍼니 제공
끝끝내 송창식의 ‘푸르른 날에’가 울려 퍼진다. 올해 31주년을 맞은 5·18민주화운동 상흔의 치유를 다룬 연극 ‘푸르른 날에’(정경진 작, 고선웅 각색·연출)가 정점으로 치달을 때였다. 5·18 때 전남도청 사수조로 모진 고문 끝에 살아남았지만 그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로 불가에 귀의한 여산이 속세에 두고 온 딸이 오월의 신부가 될 때 그 손을 잡고 입장하는 장면에서다. 시퍼런 청춘을 무참하게 짓밟히고 한 세대를 방황하던 영혼이 그리운 사람들과 다시 대면하는 순간이요,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라는 가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이가 누구이던가. 5·18의 비극을 명령한 장본인을 찬미하는 시를 지었던 시인, 그래서 오월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금기시되던 미당 서정주 아니었던가. 얼음과 숯불처럼 한곳에서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요소들이 이 연극에선 거짓말처럼 함께 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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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기리는 희곡상을 수상한 이 작품의 원작 희곡 역시 5·18이란 묵직한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사실주의적 작품이다. 그것도 불가의 난해한 선문답을 씨줄로 삼고, 다도(茶道)의 은은한 미학을 날줄로 삼아 해원(解寃)의 드라마를 짜냈다.
연출가 고선웅 씨는 이런 묵직한 비극을 말과 몸의 유희를 통해 희극적으로 풀어내는 파격을 펼친다. 배우들은 신파극 변사의 화법을 차용해 불가에 귀의한 여산(김학선)과 한때 그의 연인이었지만 형의 아내가 된 정혜(정재은)의 비극적 사랑을 정색하고 통속극처럼 그려낸다. 그런데 이게 묘하게도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는 묘한 애이불비(哀而不悲)의 효과를 빚어낸다.
5·18 때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털어낼 수 없어 불가에 귀의한 여산(김학선)과 그의 연인에서 법적 형수가 된 정혜(정재은)는 그들 친딸의 결혼식에서 30년 만에 재회한다. 신시컴퍼니 제공
이는 분명 차범석의 리얼리즘 연극에선 생각도 못할 도발적 연출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과 형식의 충돌이 묘한 극적 긴장감을 빚어낸다. 마땅히 울어야 할 곳에서 웃으면서 이런 시대극들이 빠지기 쉬운 전형성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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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폭포수 같은 말을 쏟아내야 하는 고선웅 식 연기스타일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주역을 맡은 배우들의 발성과 연기보다는 고선웅 씨가 이끄는 극공작소 마방진 출신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였다. 특히 젊은 날의 여산 역을 맡은 이명행 씨의 연기가 물이 올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29일까지 서울 중구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2만5000원.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