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곳곳 싹 안트는 ‘불량 볍씨’ 피해 속출
“60년 넘게 농사를 지었는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내가 운이 없는 것인지….”
13일 오후 4시 전남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4300m²(약 1300평) 규모 논 가운데 선 김문규 씨(80)는 황망한 표정으로 연방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김 씨는 지난달 26일 정부가 보급한 ‘호품벼’ 볍씨 30kg을 사다가 부인(75)과 함께 못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싹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결국 정부 볍씨로 심은 못자리를 갈아엎고 인근 농가에서 벼 종자를 겨우 구해 다시 못자리를 만들었다. 김 씨는 “평소에도 당뇨를 앓아 몸이 힘든데 볍씨를 두 번 뿌리니 죽겠다”며 “할멈까지도 병이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전일리 일대 30여 농가 중 김 씨처럼 정부 볍씨를 심었다 못자리를 엎은 농가는 6곳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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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제천시 청전동에서 논농사를 짓고 있는 유영광 씨(52)도 같은 일을 겪었다. 유 씨는 “처음에는 내가 못자리를 잘못해 발아가 안 되는 줄 알았다”며 “못자리를 3번이나 다시 해도 안 돼 정부 볍씨 대신 내가 수확한 종자를 써 봤더니 싹이 났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강원 전남 충남 충북 등 전국 각지에서는 연일 ‘정부 볍씨’가 논란이 되고 있다. ‘오대’(강원 충북) ‘호품’ ‘동진2호’ ‘온누리’(이상 전남) ‘주남’(충남) ‘등 정부가 보급한 볍씨 5개종에서 싹이 제대로 안 난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불량 볍씨’ 의혹이 맨 처음 제기된 곳은 강원도였다. 강원도는 겨울이 빨리 오기 때문에 벼의 파종 시기도 전국에서 가장 빠르다. 지난달 20일경부터 강원 지역에서 조생종 벼 오대 볍씨가 제대로 발아되지 않는다는 신고가 접수되기 시작했다.
놀란 국립종자원이 사태 파악에 나선 결과 강원 지역에 공급된 오대 볍씨의 28%(227t)에서 발아 지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적으로 발아율 85% 미만의 볍씨는 불량이다. 농식품부는 “강원지역 벼 면적의 12%가량(약 4100농가)이 피해를 본 것 같다”고 추정했다. 4월 말 들어 전남 충청 지역의 모판 만들기가 본격화되자 이들 지역에서도 속속 “정부 볍씨가 이상하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급기야 국립종자원은 3일 전남 지역에 공급했던 호품 볍씨 712t에 대해 사용 중단 명령을 내렸다. 1973년 보급종 생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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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식품부 관계자는 “정부가 보급한 볍씨 가운데 1300t(4.8%) 정도만 문제가 됐기 때문에 전체 쌀 수급에는 영향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자원 관계자는 “피해 농가 대부분은 자신이 갖고 있던 종자나 인근 지역에서 급히 조달한 볍씨로 못자리를 만들고 있는데 이런 볍씨는 정부 보급종보다 순도가 낮고(품종이 불분명하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것이 많다”며 “올 쌀 작황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보성=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제천=장기우 기자 straw8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