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연계출제 늘어나면서 수업방식 변화···학부모 압박에 교사들 고민 커져
고교 정규수업이 ‘EBS 문제풀이 수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EBS 연계율을 70%로 유지하겠다는 교육과학기술부의 발표 이후 본격화됐다. 24일 서울의 한 고교생이 쉬는 시간에 EBS 문제집을 풀고 있다.
적잖은 고교의 정규수업이 ‘EBS 문제풀이 시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교육방송(EBS) 연계율을 70%로 유지하겠다는 발표를 한 뒤 교과서 대신 EBS 교재로 학원식 문제풀이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가 느는 것.
지난해까지는 수능을 앞둔 고3 교실을 중심으로 이런 수업이 진행됐으나 올해는 고1, 2의 수업방식까지 바뀔 만큼 심각한 상황.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오히려 학교 현장에서 저학년 때부터 교과서를 도외시하고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을 하는 파행 운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파행 수업은 주로 학생들이 수업 전 EBS 문제를 미리 풀어오면 수업시간에 교사가 해설을 하거나, 수업시간에 시간을 정해놓고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교과진도는 EBS 문제집에 요약돼 있는 내용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부분.
학교 수업이 EBS 문제풀이 중심으로 진행되자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교사도 늘고 있다. 울산의 한 고교 3학년 Y 양(18)은 “학교의 방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EBS 교재로 수업을 하지만 ‘수업을 자유롭게 진행할 수 없다’며 힘들어하는 선생님이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창의적인 방식의 수업을 포기하는 교사도 속출한다. 입시실적을 높이려면 EBS 문제를 많이 풀어봐야 한다는 학교 측과 부모들의 압박 때문이다.
서울의 한 사립고에서 2학년 영어를 가르치는 K 교사는 수능 EBS 연계율이 강화된 지난해부터 수업방식을 EBS 문제풀이로 바꿨다. 그전까지 K 씨는 한 달 단위로 수준별 테마수업을 진행했다. 교과내용과 관련된 보충교재와 자료를 활용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주제였던 때는 △고흐의 일생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다큐멘터리 △팝송 등 주제와 관련된 영어자료와 보충자료를 활용해 수업을 진행했다. 교과서 본문 내용과 관련 있는 영어신문을 나눠주고 읽도록 한 뒤 느낀 점을 발표하는 수업도 진행했지만, 최근 모두 포기했다.
K 교사는 “EBS 연계 강화 발표 후 교사가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폭이 더 좁아졌다”면서 “EBS 교재로 수업을 진행하면 문제풀이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식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수업 주교재가 EBS 문제집으로 바뀌면서 수행평가 방식이 바뀌는 학교도 나타났다. 다양한 관점에서 학생의 능력을 검증한다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 EBS 문제풀이 수업의 연장선으로 수행평가가 진행되는 것. EBS 교재에 있는 문제를 수행평가 문제로 출제하거나 영어단어장 같은 부록자료나 문제집에 정리된 개념을 외우는 방식으로 수행평가를 치르는 학교가 적지 않다.
서울의 한 고교 3학년 장모 군(18)은 “올해부터 수행평가 비율이 기존 20%에서 30%로 올랐지만 정작 수행평가는 EBS 문제집을 푸는 걸로 대체한다”면서 “수업시간에 쓰는 EBS 교재 외에 다른 EBS 문제집을 풀고 제출하는 걸로 수행평가를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학교 시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적잖은 고교가 수능에 대비해 EBS 변형 문제를 만든다는 방침이다.
수업 주교재가 EBS 문제집으로 바뀌면서 수준별 수업이 오히려 불가능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기존에는 학생 실력에 맞춰 ‘상중하’반으로 나눠 이동수업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모두 똑같은 EBS 교재를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하위권 학생들이 어려움을 호소한다.
이태윤 기자 wol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