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수석논설위원
대지진 재앙 속에 나눈 훈훈한 情
재일교포 연극인 정의신 씨가 극본과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재일교포 가족의 어두운 삶을 다룬다. 아버지는 태평양전쟁에서 왼팔을 잃고 오사카 빈민촌에서 곱창구이 집 ‘야끼니꾸 호루몬’을 운영하며 어렵게 살아간다. 막내아들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다가 결국 자살의 길을 택한다. 역시 재일교포인 사위는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차별 때문에 취직을 못하고 방황한다. 이들의 생활 터전은 당국의 철거 방침에 따라 사라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1996년 동아일보와 일본 아사히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65%는 ‘일본이 싫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불과 15년이 경과한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반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를 돕자는 캠페인에 많은 한국인이 기꺼이 참여하고 있다.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인류애’ ‘이웃 나라의 도리’ 등 보편적인 이유만으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다. 아픈 역사적 기억이 아직 우리에게 생생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일 관계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꼽는다면 1998년 한국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치였다. 당초 일본의 퇴폐 문화가 유입되고 우리 문화 기반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으나 기우에 그쳤다. 반면에 일본 쪽에 한류를 확산시키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대중문화 분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2003년 일본 NHK가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방영했다. 2004년과 2005년 일본에서 한류는 최고조에 달했다. 최근까지도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독도 왜곡’으로 찬물 끼얹을 건가
우리 쪽에서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완화됐다. 젊은 세대는 일본의 침략성에 분노해 왔지만 일본 대중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점차 일본 문화에 호감을 갖게 됐다. 요즘 한국 학생의 일본 이미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본 대중문화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본의 한류 열풍은 일본인의 생각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도 열게 했다. 한류 스타를 찾아오는 일본인을 보면서 한국인은 여러 느낌이 교차했다.
그러나 한일 관계가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당장 이달 말 발표될 일본 중학교 교과서의 검정 결과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문부성은 2008년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통해 ‘다케시마(독도)를 둘러싸고 주장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학생들의 이해를 심화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명기했다. 쉽게 말해 교과서 안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서술하라는 주문이다. 교과서 출판사들은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해야 판매할 수 있으므로 이 내용을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일이 현실화되면 독도 문제를 놓고 다시 갈등이 불거질 것이다. 지진 피해자들을 진심으로 위로했던 한국인은 더 큰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일본 정부는 교과서 검정 발표를 미룰 필요가 있다. 이웃 국가를 배려하는 근린제국 조항을 적용해 교과서의 독도 관련 기술을 피하는 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어렵게 조성된 한일 관계의 새로운 물줄기를 막아서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