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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日本 대지진]박형준 기자, 리쿠젠타카타 르포

입력 | 2011-03-16 03:00:00

“고요하던 강 물폭탄 돌변… 해변보다 처참
아버지 찾으러 가야하는데 엄두도 못낸다”




15일 오전 7시 반경 도착한 일본 이와테(巖手) 현 리쿠젠타카타(陸前高田) 시는 어릴 때 본 히로시마 원폭 사진을 떠올리게 했다. 지진해일(쓰나미)이 나무 건물을 모두 휩쓸고 가 콘크리트 건물 몇 채만 외롭게 서 있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센메쓰(全滅·전멸)’라고 말했다.

오전 4시 미야기(宮城) 현 센다이(仙臺) 시를 출발하기 전 택시에 액화석유가스(LPG)부터 가득 채웠다. 리쿠젠타카타는 센다이로부터 약 160km 떨어져 있는데 중간에 연료가 떨어지면 오도 가도 못 하기 때문이었다. 컴컴한 새벽인데도 센다이 시내 곳곳의 주유소엔 차량들이 길게 줄을 섰다. 센다이 시내에서는 500m 정도였던 주유소 앞 차량 줄이 북부로 갈수록 길어져 1km를 넘어서는 곳도 있었다.

센다이에서 북쪽으로 약 2시간, 동쪽으로 1시간 반을 달려 이와테 현의 덴난(天南) 산을 내려와 모퉁이를 도는 순간 ‘헉’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들판 빼곡히 날카로운 대형 송곳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쓰나미가 덮치면서 목재 가옥을 산산 조각내 기둥과 서까래가 송곳처럼 변한 것이었다.

강가에서 만난 한 소녀는 “제일 좋아하던 인형이 사라져 찾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고 묻자 소녀는 “쓸려갔다”고만 답한 채 멀리 뛰어갔다.

하루 전 취재했던 나토리(名取) 시에서는 바다에서 5km 떨어진 집은 멀쩡했는데 이곳에서는 바다에서 8km 떨어진 집까지 모두 무너져 있었다. 오카모토 고요(岡本子ヨ·78·여) 씨는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이 평상시는 참 아름답지만 쓰나미 때는 3층 빌딩보다 훨씬 높은 물 폭탄으로 변했다”고 급박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바다에서 시작한 쓰나미가 강을 타고 올라왔고, 강폭이 줄어들면서 위력이 훨씬 강해진 것이다. 고요 씨는 막대기로 원래 자기 집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강 양쪽 마을이 사라지면서 리쿠젠타카타는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로 변했다.

센다이 시 해변마을 아라하마(荒濱)나 나토리 시 유리아게(e上)는 시신 수습 작업을 하며 폴리스 라인을 둘러쳐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리쿠젠타카타 시는 잔해 더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놨다. 자위대가 생존자 구조 작업에 나서고 있지만 워낙 피해가 광범위해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자원봉사자를 이끌고 있던 구조대장 사토 마사루(佐藤優) 씨는 “잔해 더미 밑에 깔린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며 “전부 수작업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수색 작업이 더디다”고 말했다. 리쿠젠타카타 시청 공식 통계에 따르면 14일 현재 신원을 확인한 사망자는 70명, 행방불명은 1282명이다.

시립제1중학교에 마련된 임시 피난처에 있던 다카하시 노리코(高橋德子·46·여) 씨는 “아버지가 행방불명이다. 하지만 잔해 더미가 너무 많이 쌓여 있어 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부서진 목재를 보면 너무나 무서워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피난처에는 다카하시 씨를 포함해 1000여 명의 이재민이 수용돼 있었다. 식은 주먹밥 한 개와 일본식 된장국(미소시루) 한 그릇이 한 끼 식사였다. 도시유키 스즈키(智之鈴木·61) 씨는 “심장병을 오래 앓았다. 원래 하루에 약을 일곱 종류 정도 먹는데 며칠째 못 먹고 있다. 걷기조차 힘든 지경이 됐다”고 말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