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한국사립미술관 협회장
작년 말 한 대기업 임원진 강연이 끝난 후 질문시간에 상무라고 밝힌 수강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 사립미술관은 100여 개에 불과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대기업 임원인 그가 평소 미술관 관장을 만날 일이 있었겠는가.
소장품 쌓이자 멋모르고 나섰지만
예를 들면 지난번 관장 모임에서는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 “많은 돈을 써가면서 열심히 운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다면 감히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꿈조차 꾸지 않았을 텐데, 한마디로 미쳤지요.”(모란미술관 이연수 관장)
“그때는 젊어서, 미술에 미쳐서 겁 없이 이 일에 뛰어들었어요. 담당공무원들이 사립미술관과 화랑을 구분조차 하지 못하던 시절에 덜컥 미술관을 설립하고 30년 동안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운영해왔어요.”(토탈미술관 노준의 관장)
“미술관을 누구에게 물려주나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요. 우리는 미쳐서 고생을 감수한다지만 자식들이야 맨정신인데 자기 돈 들여가면서 이 일을 하겠어요.”(무등현대미술관 정송규 관장)
관장들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사립미술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미쳐야 미친다’는 책에 나오는 그 미치광이들이다. 간혹 값비싼 미술품을 수집하고 소장할 만큼의 재력가라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기업재단의 경우 기업 이미지 개선이나 사회 환원을 목적으로 미술관을 설립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립미술관 관장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미술관을 만든다.
“열심히 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
그러나 미술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과 미술에 대한 열정 및 수집 욕구는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채 관장이 되었다는 게 문제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관장들은 깨닫는다. 미술관의 정체성, 비전, 핵심가치, 중장기 운영자금, 컬렉션 방침 등 관장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건 등에 대해 치밀한 계획과 준비 없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그 순간 두려움이 싹튼다. 아! 조선 최대의 서화 소장가로 알려진 상고당 김광수나 육교 이조묵처럼 되겠구나. 간담이 서늘해지는 그때가 미치광이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점이다. 18세기 후반 조선 최고의 미술품 수집가였던 김광수는 집안 좋고 재력도 있는 행운아였지만 미친 듯 컬렉션을 늘리다가 가산을 탕진했다. 같은 시대 최대의 서화 소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이조묵도 ‘그림 속에서 늙은 사람’이라면서 즐거워했건만 말년에는 끼니도 잇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관장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업료를 지불하고 혹독한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갖게 된다.
정조 때 문필가였던 유한준은 미술애호가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아는 사람(知之者)과 사랑하는 사람(愛之者), 보는 사람(看之者), 수집하는 사람(畜之者)이다. 그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한국인에게 회자되는 명언을 남겼다. 미술관 관장이 되려면 미술품을 사랑하고 보고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친 미술 사랑을 새로운 지식으로, 혜안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어쩌면 우리는 잘 몰랐기 때문에 감히 미술관을 설립하고 운영하겠다는 용기를 가졌다고.
사립미술관 관장이 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훤히 알고 있는, 셈에 밝고 영리한 사람이라면 미술관을 만드는 무모한 짓을 벌일까. 뒤늦게 제정신이 든 우리는 누군가가 미술관을 설립한다는 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면서 말리곤 하는데 과연 잘한 일일까. 혹 철없는 미치광이들 중에 미술관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길 제2의 전형필(간송미술관 설립자)이 끼어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런 엉뚱한 상상은 의기소침해진 우리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천연 엔도르핀이다. 수시로 마음이 약해지는 나에게는 더욱더 절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