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이만기 키우며 인생2막
《1983년 민속씨름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프로화 첫해였던 4월 제1회 천하장사대회에는 유료 입장객(1인당 1000원) 1만700여 명 등 2만7000여 명의 관중이 몰렸다. 초대 천하장사에 오른 경남대생 이만기(인제대 교수)는 스포츠 단일대회 개인경기 상금 사상 최고인 1700만 원을 받았다.》
당시 무명의 이만기가 결승에서 쓰러뜨린 장사는 경상대 최욱진 씨(50·진주남중 씨름부장·사진)였다. 최 씨는 ‘모래판의 여우’로 불리며 대학 씨름계를 주름잡았다. 앞무릎치기 뒤집기 등 기술 씨름의 고수였다. 천하장사 타이틀은 놓쳤지만 그해 이만기와 다섯 번 맞붙어 2승 3패를 기록할 정도로 라이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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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최욱진이라는 이름은 씨름 팬의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그는 1984년 대학 졸업 후 모교인 진주상고 체육교사가 됐다. 보해양조 선수로 잠시 복귀했지만 무릎 부상 때문에 1986년 자의반 타의반 은퇴했다. “운동을 그만둘 때는 울고 싶었습니다.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최 씨는 현역에서의 아쉬움을 후배 양성에 쏟았다. 5년 전 모교인 진주남중 씨름 팀을 맡았다. 지난해 전국 대회 4개 가운데 2개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22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57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시상식에서 지도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1982년 아마추어 씨름왕 자격으로 우수상을 받은 지 29년 만이다.
‘모래판의 여우’ 최욱진(왼쪽)이 1983년 7월 제3회 민속장사씨름대회 한라급 결승에서 그해 천하장사 였던 이만기를 3 대 1로 꺾고 우승한 뒤 환호하고 있다. 그는 빠른 기술 씨름의 대명사였다. 동아일보DB
최 씨는 초등학교 때 큰 키(170cm)에 힘이 좋다는 이유로 씨름에 입문했다. 50대에 접어든 그는 머리숱이 줄었고 주름살은 깊어졌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의 키나 현역시절의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했다. 그에게 성인 씨름계에 진출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욕심은 버렸다. 좋은 후배를 길러 1등을 만드는 게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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