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기 사회부 기자
하지만 A 씨는 이날 또 다른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경찰의 안이한 인권 의식 때문에 피해자인 A 씨의 얼굴이 고스란히 기자들에게 공개됐기 때문이다. 경찰은 방송 뉴스 촬영을 위해 영상 자료를 제공한다며 피해 여성 A 씨와 피의자 2명을 함께 브리핑에 데리고 나왔다. 이 자리에 함께 나온 A 씨의 친구는 “(A 씨가 고국에) 자녀가 있는 사람인데 피해자에게 이렇게 카메라를 들이대도록 놔두면 어떡하느냐”며 경찰에 따져 물었다.
하지만 경찰은 “언론에서 다 알아서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경찰은 또 브리핑 중간에 A 씨와 피의자만 남겨둔 채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좁은 공간에서 피의자인 외국인 근로자들은 A 씨를 가만히 노려보기도 했다. 경찰은 이날 성폭행 미수의 증거로 A 씨가 입은 상처를 찍은 사진을 취재진에게 제공했다. 이 중 일부 사진에는 A 씨의 상의 속옷이 노출되기도 했다.
광고 로드중
하지만 성폭행 사건은 직접적인 1차 피해는 물론 이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 2차 피해도 그에 못지않다는 점을 경찰이 몰랐을 리 없다. 만약 외국인 근로자가 아닌 우리 국민이었다 해도 이럴 수 있었을까. 피해자의 동의를 구했다고 하지만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끔찍한 성폭행 피해를 볼 뻔한 A 씨가 과연 자신에게 도움을 준 한국 경찰의 제안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인권’은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사람이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다. 수도 서울의 치안을 책임지는 서울경찰청이 어떻게 이런 ‘인권 불감증’에 걸려 있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이다.
신민기 사회부 min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