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세계’ 16명 사연 소개
김종해 시인은 목월 선생과 우연히 함께한 저녁 자리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날 만남은 목월 선생 타계 후 20년이 지난 뒤 ‘현대시학’에 ‘저녁밥상’이란 시로 되살아났다.
‘스승 목월 내외분이 우리 집에 오셨다/상계동 저녁 어스름이 하늘에 깔리고/그 밑에서 불암산이 발을 씻고 있었다/목월은 지팡이로 불암산을 가리키며/그놈 참 자하산 같구나/저녁밥상 위에는 어머니가 손수 기른/닭 한 마리 올라와 있다/…’
정호승 시인은 은사 김현승 시인을 떠올렸다. “상병 때이던가, 김현승 시인의 시를 흉내 낸 몇 편의 시를 그만 선생님께 우편으로 보내고 말았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숭실대에 재직 중이셨는데 ‘언제 휴가 나오면 학교로 한번 들르도록 하라’는 내용의 친필 엽서를 보내주셨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정 시인은 은사에 대한 흠모와 존경을 담아 ‘네가 나는 곳까지/나는 날지 못한다’로 시작하는 시 ‘꿀벌’을 쓴 뒤 자신의 첫 시집에 실었다고 밝힌다.
오탁번 시인은 자신의 시 창작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주저 없이 미당 서정주를 꼽았다. “까놓고 말하면, 내 시 속에 느닷없이 들어와서 나를 꼼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 시인은 미당이다. 시와 소설을 함께 쓰던 젊은 날의 나에게 서정주 말고 다른 시인들의 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 시인은 벌써 10년도 전에 미당을 ‘왕겨빛 그리움’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로 형상화한 ‘미당을 위하여’란 시를 썼다고 밝힌다. 문정희 시인 또한 미당 타계 전 병석에 있던 모습을 보고 시 ‘그의 마지막 침대’를 썼다.
때론 한 줄의 농담에서 시 한 편이 탄생하기도 한다. ‘시름시름 앓는 나를 보고/문정희 시인이/신 선생 약은 딱 하나/산도적 같은 놈이 확 덮쳐 안아주는 일이라 한다/그래 그거 좋지/나는 산도적을 찾아/내일은 광화문을 압구정동을/눈웃음을 치며 어슬렁거려 봐야지/…’ 어느 4월 평온한 저녁, 커피를 함께 마시던 문 시인의 농담에 착안해 신달자 시인이 쓴 ‘산도적을 찾아서’다.
시인은 착실하게 다음과 같은 후기까지 남겼다. “며칠 전 택시를 탔는데 글쎄 기사가 대뜸 내게 묻는 게 아닌가. ‘문정희 시인이 처방한 거 이루어졌습니까?’ 아이고 맙소사! 그게 그렇게 소문이 났단 말인가. 산도적은 아직 멀기만 한데….”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