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슬러-구호 광고 촬영 현장 스케치
휘슬러가 주방기구에 판타지를 입히고 클래식과 오페라의 이미지를 차용해 만든 새 광고 촬영 현장. 19일 진행된 이 광고 촬영은 사진작가 강영호 씨(가운데 지휘하는 사람)가 기획부터 제작을 모두 맡았다. 강 작가는 스스로 모델이 되기도 했다. 사진 제공 각 업체
“팔을 더 높게….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몸을 좀 더 낮추고, 더 크게 움직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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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셔터를 눌러대던 사진작가 강영호 씨가 마침내 ‘오케이’를 외치더니 이번에는 4명의 모델 사이에 섰다. 그 역시 사진을 찍을 때부터 짙은 흰색 분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회색 파우더로 머리카락 색도 바꿨다. 작가 스스로가 모델이자 사진가로 2가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지휘자’로 무대에 선 그는 ‘현악 4중주’를 상징하는 4명의 모델을 능숙하게 지휘했다. 배경 음악은 라벨의 ‘현악 4중주 F장조’로 바뀌어 있었다.
제일모직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의 업그레이드 프로젝트 홍보 동영상 화면. 마치 독일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슈의 무용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사진 제공 각 업체
예술 또는 문화를 홍보나 판촉의 수단으로 삼는 ‘아트 마케팅’은 최근 기업들이 선호하는 주요 마케팅 전략이다. 신세계백화점이 조용필 콘서트를 열어 우수 고객을 초청한 것이나, 롯데백화점이 최근 발레리나 서희 씨와 문학평론가 박동규 씨를 광고 모델로 채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의 마케팅 활동이다.
예술 마케팅의 역사는 짧지 않지만 요즘 경향은 이전과는 다르다. 단순한 메시지 전달의 매개체나 상징물에 그치던 예술이 좀 더 적극적인 메시지 전달의 주체로 떠오르는 것도 주목할 만하지만, 어울리지 않을 듯한 제품과 장르를 혼합하는 경향도 재미있다. 휘슬러 광고를 기획한 강영호 작가는 “고급 주방기구가 여성들의 로망이라는 점에 착안해 판타지를 주제로 삼았다”며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하고 배우들의 분장과 의상 콘셉트에는 오페라의 이미지를 넣었다”고 설명했다. 분장은 메이크업 디자이너 정샘물 씨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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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4로 촬영한 박찬욱, 찬경 형제 감독의 ‘파란만장’.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영화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사진 제공 각 업체
휘슬러의 광고 촬영이 진행되던 날 오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갤러리에서는 제일모직 ‘구호(KUHO)’ 브랜드의 업그레이드 프로젝트 발표회가 열렸다. 구호 브랜드의 창설자인 정구호 전무가 이날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진행했다. 정 전무는 “독일의 문화와 건축에서 영감을 얻은 미니멀리즘과 아방가르드가 구호 브랜드의 업그레이드 콘셉트”라고 말했다. 정 전무는 키르히너(회화), 구르스키(사진), 쉬테(건축), 바우슈(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독일 예술가들을 예로 들었다.
이어 상영된 ‘구호’의 새 CF 필름 원본은 패션과 무용의 자극적인 만남을 연상시켰다. 발레리나, 발레리노를 모델로 썼다는 이 영상은 구호의 옷을 입은 모델들이 바우슈의 현대 무용을 표현한 듯한 내용이었다. 정 전무는 “패션은 이제 ‘시크’ ‘섹시’ 같은 하나의 관용구로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라며 “무용 같은 다양한 장르의 문화병합을 통해 패션 아이덴티티를 설명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스틸 컷을 모아 동영상을 만들기로 한 휘슬러와 달리 제일모직은 스틸 광고에도 동영상을 캡처한 컷을 쓸 예정이다.
스마트폰과 영화의 접목을 통한 마케팅도 시도되고 있다. 박찬욱, 찬경 형제가 감독한 ‘파란만장’은 영화의 전 장면을 아이폰으로 촬영하고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다. KT가 작품 제작을 후원했다. 형제 감독의 이 영화는 다음 달 10일부터 열리는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영화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돼 예술성을 입증하기도 한 작품이다. 김대우 감독은 삼성전자의 ‘갤럭시S’로 단편영화 ‘우유시대’를 촬영했다. 우유시대는 ‘갤럭시탭’으로 즐기는 영화라는 의미에서 ‘탭 무비’로 불리기도 한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