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기대오던 큰나무 잃었지만영원한 소설가로 남으시기에…
소설가 김연수 씨
늘 거기 계셨다고 해서 영원히 거기 계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 몇 년 새에 나는 절절하게 배우는 중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까먹는다. 자꾸만 까먹고 후회한다. 한 번 떠나시면 그 자리 영영 빈 자리로 남는다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슬퍼한다. 열등생처럼, 언제나 뒤늦게. 선생님이 불현듯 떠나시고 나니, 늘 기대던 큰 나무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아이처럼 당황스럽다.
여러 기억들이 머리를 스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해 조문사절단의 일원으로 바티칸에 다녀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서 다짜고짜 “선생님, 저하고 인터뷰해주세요. 제발요, 꼭요!”라며 졸랐었다. 어떻게 그런 응석받이 같은 말이 나왔을까? 전화를 끊고 나서 혼자서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어려서 소설에 재미를 붙인 이래 늘 그분의 작품을 곁에 두고 읽었으니 저 혼자 그처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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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만 되면 염치도 없이 꽃을 너무 많이 피워서 나는 보기가 싫어요.”
박완서 선생님이 어떤 분이셨나 돌이키자니 그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까 문단의 큰 어른이고 친정어머니 같은 분이셨다고 말씀하시지만, 내게는 돌아가실 때까지 ‘박완서는 박완서’였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세상을 사신 분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잘못됐다면 그걸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으셨다. 모든 걸 포용하는 분이 아니어서 나는 선생님이 좋았다. 활짝 핀 목련나무에서도 염치를 따졌던 분이시니까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선생님은 소설가였고, 그러니까 또 앞으로도 영영 소설가로 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긴 해도 슬픔은 남는다. 담당 선생님이 좋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던 중학생 시절을 떠올릴 때처럼, 이제 선생님 돌아가시고 하루가 지나고 보니 선생님께 들었던 좋은 말씀들은 어쩐지 희미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즐거이 농담을 하시면서 와인을 드시던 그 모습만 또렷하다. 이제 박완서 선생님의 신작을 읽을 수 없겠구나. 부고를 들었을 때는 그게 제일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하루가 지나고 보니, 그렇다면 그건 지금까지 쓰셨던 책들, 내가 10대 때부터 읽었던 책들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그 책들 안에서 영원히 새롭게 읽힐 테니까. 나뿐만 아니라, 이제 내 뒤에 올 많은 사람들에게도.
남는 슬픔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들이다. 눈에 대한 기억처럼. 봄이 오면 눈은 흔적도 없이 녹을 테고, 우리는 이 겨울의 일들을 거의 대부분 다 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일들은 끝내 잊히지 않고 우리 기억 속에 남겠지. 슬픔은 그런 일들에서 비롯한다. 내 슬픔 역시 그처럼 너무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들이라 이런 지면에 쓸 수도 없다. 그러니 그저 슬퍼서 슬프다고 쓸 뿐이다. 선생님이 이제 떠나신 세상에도, 또 우리가 남은 여기에도 오직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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