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 저축은행이라면 고개를 가로젓던 은행도 180도 바뀌었다.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금융권 전체가 나서서 저축은행을 빨리 안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앞장섰고 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민병덕 국민은행장, 류시열 신한금융지주 회장도 약속이나 한 듯 저축은행 인수 의사를 비쳤다. 4대 금융지주회사들이 일제히 부실 저축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모습은 김석동 위원장이 취임사에서 “금융위의 존재감만으로 시장질서와 기강이 바로 설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한 그대로다.
얕보다간 큰코다칠 저축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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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 부실 처리는 더 미룰 수 없는 화급한 일이다. 관치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도 공감이 간다. 전임자들이 미뤘던 일을 욕을 먹더라도 끝내겠다는 의지는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금융지주회사에 저축은행 부실을 강제로 떠넘기는 방식은 당장의 득보다는 장기적인 손실이 더 크고 상처가 깊을 수 있다.
은행에 인수시키는 첫 번째 이유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다는 지적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은행에는 이미 12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우리은행이 저축은행을 인수한다면 사실상 공적자금이 우회 투입되는 격이다. 공적자금으로 회수되어야 할 돈이 저축은행으로 가는 결과다. 공적자금 투입이 없다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저축은행 부실이 말끔히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은행도 부동산 부실 대출이 우려되는 처지에 저축은행 부실을 떠안는 것은 위험이 크다. 과거 저축은행 부실 처리를 위해 은행이나 더 큰 저축은행에 인수시켰지만 부실을 더 키웠을 뿐이다. 차라리 공적자금을 넣고 문을 닫은 뒤 부실책임을 묻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스페인에서는 부실을 감추고 미룬 저축은행이 재정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개별 저축은행의 드러난 부실이 작다고 얕보다간 큰 코다칠 수 있다. 감춰진 잠재부실이 많기 때문이다.
도이치증권은 왜 처리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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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 부실 처리는 본격화될 관치의 신호탄이다. 외국자본의 투자도 없고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저축은행이 만만한 상대로 선택됐을 뿐이다. 다음 상대는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는 우리은행 같은 곳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금융가에 나돈다. 민영화를 하되 정부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은행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금융 관료들이 금융 안정을 위해 금융회사에 관치를 휘둘러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금융감독권은 적절하게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금융 관료들은 외국자본에는 무력한 것 같다. 작년 11월 우리 증시를 교란시켰던 도이치증권에 대해서는 여태 아무런 조사 결과도, 조치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젠 우물 안 개구리식 관치금융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