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기암괴석에 정자, 누각이 어우러진 풍경. 얼핏 보면 전통 산수 같은데 그림에 로봇과 놀이공원까지 등장한다. 과거의 틀에 현대 풍경이 개입한 것 말고도 신기한 점이 또 있다. 선녀처럼 하늘을 나는 이도, 신선 차림으로 유유자적하는 이도 얼굴이 똑같다. 바로 작가 자신의 얼굴이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전시공간 ‘16번지’에서 열리는 서은애 씨(40)의 ‘유쾌한 은둔’전은 보는 내내 잔잔한 웃음을 선사한다. 21세기 여성 작가가 선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산수를 유람하는 작품들. 그 속에 스며든 독창적 시각과 유머가 예술작품에 대한 부담감과 거리감을 사라지게 한다. 게다가 수묵화의 전통 화법으로 그려낸 화면 속 시공간은 오래된 옛날처럼 보이지만 과거와 현재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차원으로 번안된 점도 흥미롭다. 내년 1월 2일까지. 02-722-3503
시각예술과 소리예술이 만나는 ‘정마리의 정가, 이수경의 헌신’전 역시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이 빚은 결실이다. 정가는 옛 시를 노래로 부르는 전통성악곡으로 시조 가곡 가사가 여기에 속한다. 지난해 겨울부터 가사를 알기 힘들 정도로 느리게 이어지는 정가의 웅숭깊은 매력에 빠져든 미술가 이수경 씨(47). 그가 1년 동안 정가를 들으며 완성한 160여 점의 드로잉에 정가를 노래하는 정마리 씨(35)의 공연이 함께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내년 1월 23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전시 2000원, 매주 금·토 공연 1만 원). 02-760-4850
예스러운 것과 현대적인 것을 섞어 작업하는 서은애 씨의 그림에는 유머와 웃음이 스며 있다. ‘유쾌한 은둔’전에 선보인 ‘청산은거 유락도’에서 작가는 신선 차림으로 로봇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다.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인간의 행복에 대한 염원을 담아낸 이번 전시는 ‘유원지 산수’ 등 동서양의 감성이 혼합된 수묵화부터 휴대용처럼 제작한 두루마리 형식의 산수, 자개로 만든 부조, 글과 그림을 결합한 책(冊) 형식의 작품까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 1888년 청대 말기에 발행된 화보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책자 ‘화중유시(畵中有詩)’는 인상적이다. 중국과 한국의 한시를 읽으며 작가의 가슴을 파고든 내용을 화제(畵題)로 인용하고 등장인물을 자신의 얼굴로 대체한 그림을 곁들인 작품이다.
여유를 갖고 그림과 한시를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인간 본연의 소망과 감정은 과거와 현재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된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회한, 다가올 나날에 대한 걱정,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마음…. 그래서 중국의 한시를 인용한 작가노트는 과거와 현재의 통하는 지점을 다시 되짚게 한다. ‘누가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고 하는가/시대는 달라도 지향하는 바는 같으리.’
○ 느리게 흘러가다
‘정마리의 정가, 이수경의 헌신’전은 현대 시각예술과 전통적 소리예술의 결합을 보여 준다. 정가를 들으며 이수경 씨가 그린 드로잉 사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정마리 씨(오른쪽)의 정가가 흘러나온다. 사진 제공 아르코미술관
선인과 우리 사이에 변치 않는 공감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두 전시. 옛것과 오늘의 세계의 물리적 만남이 아닌, 화학적 융합을 바탕으로 이룬 튼실한 결실이란 점에서 돋보인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