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적 거장 디자이너 라시드 씨가 말하는 디자인
애경의 주방세제 ‘순샘 버블 올리브’ 용기를 디자인한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 씨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9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애경 디자인센터에서 만난 그는 흰색 정장 속에 핑크색 후드티를 받쳐 입은 차림이었다. 핑크색 신발까지 조화를 이뤄 평소 ‘원색’을 선호하는 그의 경향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제공 애경그룹
어떤 예술 작품이건 그 작품에 감춰진 작가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작품 그 자체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뿐, 일일이 해설을 달아주지는 않는다. 작가들은 보통 자신의 작품이 다양하게 해석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의도를 알아가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도 드물다. 감상자가 작가의 의도를 알면 알수록 그 작품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애정도 깊어진다. 도대체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시원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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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으로 분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런 궁금증은 디자이너의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쓰는 용품들을 디자인하는 산업 디자이너의 ‘결과물’들은 기능성에 예술성을 더한 것들이어서 더 알고 싶은 점이 많다.
이집트 출신으로 뉴욕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 씨(50)는 산업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는 ‘슈퍼스타’ 같은 존재다. 간결하면서도 곡선을 잘 살린 형태에 원색을 적절히 배합한 그의 디자인은 늘 소비자의 관심을 끈다. 세계적인 기업과 공동 작업을 해온 그는 한국의 많은 기업들과도 협력하고 있다.
그는 최근 애경그룹의 ‘리버스(Rebirth) 디자인 공모전’ 심사와 시상을 위해 방한했다. 대학생들의 생활용품 디자인 공모전이다. 아마추어 디자이너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심사한 뒤 잠시 짬을 낸 그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애경 디자인센터에서 만났다. 9일 오후였다.
라시드 씨 앞에 그가 디자인한 ‘작품’ 몇 개를 내밀었다. 그의 입을 통해 직접 해설을 듣고 싶다는 욕심에서다. 의외로 ‘친절하고 꼼꼼하게’ 전해주는 설명에서 그의 디자인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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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순샘 버블 올리브, 오(EAU), JUS, the Black.
세제 자체가 투명한 액체라는 점을 활용해 밝은 연두색이면서도 속이 비치도록 디자인해 깨끗한 느낌을 강조했다. 여기에 ‘인간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인간적인 면모는 장난스러운 모양의 장식고리에서 드러난다. 라시드 씨는 “주방세제를 쓰면서 심각할 필요가 있느냐”며 “흥미롭고 재미있는 모양을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급스러움(luxury)을 연상시킨다는 설명이다. 여기에는 명품 화장품이나 향수 용기를 디자인해온 그의 경험이 녹아 있다. 비록 비싸지 않은 제품이지만 이 제품을 사용하는 주부들에게 마치 비싼 향수나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것. 가사 노동은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것이 이 디자이너가 소비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 신용카드
기자가 “화제를 ‘비싼 상품’으로 돌려보자”며 현대카드의 ‘the Black’ 카드의 사진을 들이밀었다. 초우량고객(VVIP)용 신용카드다. 그러자 그는 “신용카드는 비싼 상품이 아니라 민주적인 상품”이라고 맞받아쳤다. 그는 “신용카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그 ‘한도’가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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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코드, 작품 속에 숨겨져 있죠”▼
# 주스
SPC그룹에서 나오는 주스 ‘JUS’와 생수 ‘오(EAU)’는 라시드 씨가 디자인은 물론이고 제품 이름을 짓는 과정(네이밍)과 제품의 콘셉트를 잡는 데까지 폭넓게 참여한 제품이다. 두 제품 모두 올해 국제 패키지 디자인 콘테스트인 펜타어워즈의 음료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한 제품이다.
라시드 씨는 “주스 병의 삼각형 모양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 식품의 3요소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한 손에 꼭 들어가는 크기와 좁은 밴드 라벨로 동양적인 단순미를 강조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주스 병에 식품의 3요소라니. 의외라는 반응에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에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포함하는 것을 즐긴다”며 “소비자가 궁금해하더라도 드러내지 않고 숨겨놓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동양적인 단순함(minimalism)’에 대해서는 “동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라며 “오히려 직관에서 출발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마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의 영향일 수도 있을 것”이라며 “내 안의 DNA에 흐르는 단순함”이라는 표현을 썼다.
# 생수병
생수 ‘오(EAU)’에 대해 묻자 곧바로 뚜껑에 물을 따라 마셔 보였다. 그는 “에비앙이 생수를 병에 담아 판매한 이후 사람들은 물을 병째 마시기 시작했다”면서 “그렇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보온병 뚜껑에 물을 따라 마셨다”고 말했다. 라시드 씨는 “이 생수병은 그때를 기억하며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컵치고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느낌이다. 뒤집으면 둥근 바닥이 아래로 내려가 탁자 위에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라시드 씨는 “탁자에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어딘가에 두고 가지 못하고 꼭 챙겨 가야 한다”며 웃었다. 그는 “그 때문에 뚜껑이나 병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친환경 디자인을 고집하는 그의 신조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라시드 씨는 “우리에게는 모든 고객에게 ‘지속가능성’에 대해 교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며 “친환경은 내가 디자인을 처음 배울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 그리고…
그는 단순명료한 디자인과 함께 밝고 강한 색을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그 이유를 물어봤다. 대답은 간단했다.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라시드 씨는 “사람은 1만6000가지 색깔을 구분할 수 있는데 왜 흑백에만 집착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곡선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곡선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각형이 아니라 곡선으로 구성된 TV도 디자인했단다. 삼성전자를 위한 디자인이었는데 삼성전자가 ‘채택’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삼성은 소비자가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소비자는 늘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열린 공모전 시상식에서 라시드 씨가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전한 연설에는 디자인에 대한 그의 지론이 녹아있었다.
“나는 디자인을 말할 때 흔히 ‘과거의 이력을 부순다’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의자를 디자인했을 때, 나는 기존에 있던 것을 개량하기보다는 새로운 이미지를 상상해 만들어냈다. 그런 작업은 바쁘게 돌아다니고 많은 자료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얻어내는 통찰에서 나온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은 좋지만 지난 것을 답습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보다는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