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정부는 애써 외면하지만
2, 3년 전부터 노벨 평화상이 중국 반체제 인사에게 주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베이징의 지식인 사회는 류샤오보를 대표 인물로 골랐다. 노르웨이의 노벨상위원회는 이들의 선택에 가담했다. 중국 지도부 역시 류샤오보를 국가전복 혐의로 징역 11년형에 처함으로써 그를 선택했다. 그는 대표자였기 때문에 처벌을 받은 것이다. 중국 정부 대변인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 이 외톨이(un homme seul)에게 어떻게 관심을 둘 수 있느냐”며 서구를 세뇌시키려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높은 경제성장으로 마취시켰다고 믿었던 베이징의 고학력자들 사이에서 이 외톨이가 갑자기 여론의 리더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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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이래 그 희생자의 존재를 줄곧 부인해 왔다. 적십자는 6000여 명의 사망자를 확인했다. 사망자의 이름은 무시됐고 그 시신은 사라졌다. 부모는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으며 그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한 채 떠돈다. 류샤오보에게 주어진 상금은 ‘톈안먼 희생자 어머니회’로 간다.
중국 공산당이 류샤오보를 통해 구현된 이 같은 정의의 요구를 인정할까. 중국 정부는 노벨상위원회가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채 노르웨이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자유사회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사고의 개념이 중국 지도자에게는 생소하다. 그들이 중국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포로이기 때문이다.
류샤오보로 상징되는 정의 원해
이 이데올로기가 2012년 새 세대 지도부의 등장과 함께 변할 것인가. 서구와 아시아에서 소위 ‘중국의 친구’를 자처해온 사람들, 다시 말해 중국 정부가 보살펴온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향한 중국의 ‘자연스러운’ 발전을 역설한 지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변화를 전혀 볼 수 없었기에 노벨상위원회는 독재권력의 무시무시한 견고함을 확인해준 것이다. 그러면 변화는 외부로부터 올 수 있을까. 중국은 경제력의 지속적인 확장을 위해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만약 서구가 중국산 제품을 보이콧할 정도까지 중국의 명성이 상처를 입는다면 중국의 경제적 기적은 무너질 것이며 공산당은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 것이다. 류샤오보는 우리에게 “공산당과 중국 국민을 혼동하지 말라”고 말한다. 한국은 민주화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메시지의 뜻을 이해하고 거기에서 중국인과의 관계에 필요한 교훈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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