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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15년 만에 퇴임하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입력 | 2010-10-20 03:00:00

“캠코더 하나 장만해 직접 다큐영화 찍고싶어”




세상의 수많은 김(金)씨 가운데 해외 유수 국제영화제 사람들이 부르는 ‘미스터 김’은 오직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한사람이다. 그는 부산영화제와의 15년간 인연을 마감하며 해외영화제 경험담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자그마한 흰색 여행가방 두 개.

19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동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에 놓인 김동호 집행위원장(73)의 ‘이삿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는 1996년 초대 집행위원장으로 인연을 맺은 부산영화제와 올해를 끝으로 작별을 고했다. 7∼15일 열다섯 번째 영화제에 모인 사람들은 아쉬움 젖은 스포트라이트를 김 위원장에게 비췄다. 한국 영화인들은 물론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 티에리 프리모 칸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대만의 허우샤오셴 감독 등 해외 게스트들도 그의 뒤에 둘러서서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14일 밤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페어웰 파티’에서 김 위원장은 “이제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모두가 부산 시민을 비롯한 많은 분의 아낌없는 도움 덕택이었다.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는 인사를 남겼다. 공식행사를 끝낸 뒤 16일 오후 자원봉사자 쫑파티까지 참석한 그는 주말 내내 몸살을 앓았다. “베트남영화제 개막식에 초청받아 17일 오전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취소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이번에 예약한 좌석도 이코노미 클래스였나. 해외영화제 출장이 잦았는데 한 번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지 않았다고 들었다.

“부산영화제 예산으로 가는 경우는 무조건 그랬다. 그렇게 아끼는 돈으로 해외 영화인을 2, 3명 더 초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행인이 불편해할 때는 다음 비행기로 뒤따라갔다. 아무것도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몇 개 영화제에 가본 건가.

“65개쯤? 그중 38개 영화제의 기행문을 묶어 이달 초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라는 책을 냈다. 15년 동안 해마다 열다섯 곳 정도씩 다녔다. 영화제 관계자가 국제영화제 경험담을 쓴 책은 전례가 없을 거다. 프리모 위원장이 영문판을 보더니 ‘칸 영화제에 대해 내가 모르는 이야기까지 써 놨다’며 칭찬해 주더라. 하하.”

―젊었을 때 ‘영화를 삶의 일부로 삼으리라’고 꿈꾼 적이 있었나.

“전혀. 인생길에는 계획대로 되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맞이하는 계기가 행로를 바꾼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이 급선무라 채용공고 나는 순서대로 시험을 보려 했는데 첫 번째가 문화공보부였다. 사실 내심 한국은행에 가고 싶었다.”

―영화는 원래 자주 봤나.

“학생 시절에는 영화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문화부에 들어가면서부터 관내 시사 때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영화에 ‘올인’하기 시작한 건 영화진흥공사 사장 때부터다. 마침 영화 수입이 자율화되면서 연간 35억 원 정도 발생하던 공사 수입이 사라져 존폐 여부를 알 수 없는 위기상황이었다. 국고 보조금 따내고 영화인들 의견에 따라 종합촬영소를 건립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1988년 이후 만들어진 한국영화와 수입된 주요 외화는 거의 빠짐없이 챙겨 봤다.”

―타고난 근면이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 셈인 것 같다. 22년 동안 모든 걸 다 쏟아 부었는데, 아쉬움이 남지 않나.

“사랑받으면서 떠날 수 있어서 행복할 뿐이다. 사람은 나서고 물러나는 데 태도가 분명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좋은 때를 알아야 한다. 주변에서 말리는 대로 한 해 더 주저앉았다면 내년에도 올해만큼 큰 박수를 받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제 결심했나. 그만두라는 ‘외압’이 작용했다는 소문도 있다.

“어림없는 얘기다. 처음부터 10회 정도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2005년은 부산영화제 전용관인 영상센터 ‘두레라움’의 국제설계공모를 겨우 마친 때였다. 예산도 정해지지 않았고. 2009년 1월 두레라움 착공을 보면서 이제 정말 떠나자고 마음을 굳혔다. 하도 말려서 한 해 더 미뤘지만 다시는 딴말 나오지 않게 그 뒤로 해외영화제 갈 때마다 ‘2010년이 마지막’이라고 못을 박고 다녔다.”

―김 위원장 없는 부산영화제의 미래에 대한 영화인들의 우려가 그만큼 큰 것 아닐까.

“특히 해외 영화인들과의 네트워크 유지를 걱정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새롭게 형성하면 되는 거다. 내년은 부산영화제가 새롭게 태어나는 해다. 칸 영화제의 뤼미에르 극장처럼 부산도 드디어 숙원이었던 전용관을 갖는다. 9월 완공될 두레라움의 첫 문을 어떤 모습으로 여는가가 굉장히 중요하다. 후임 이용관 집행위원장, 그리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해 온 사람들은 그 역사적인 시작을 책임질 사명이 있다. 난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을 거다.”

―무료하지 않겠나.

“당장은 서예와 사진 공부를 시작할 작정이다. 1964년 국전에서 서예로 입선했다. 그 뒤 솜씨는 닦지 못하고 외국 다니면서 좋은 붓만 여러 개 사 모아 놨다. 하하. 그림도 워낙 좋아해서 가능하면 유화도 배워보고 싶다.”

―영화와의 인연은 정리하는 건가.

“22년을 사랑했는데 그럴 리가. 디지털 캠코더를 하나 장만해서 직접 작품을 만들 거다. 인터뷰를 모아 엮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사람들과의 관계가 밑천이다. 왕자웨이나 허우샤오셴 같은 친구들을 찾아가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영상으로 담아 보려 한다. 내 얘기를 하나 할까. 누구나 가장 오래 묵은 기억 속 영화가 있지 않나. 내게 그건 영국영화 ‘분홍신’(1948년)이다. 내용은 어렴풋한데 ‘영화’ 하면 어릴 때 본 그 작품의 몇몇 이미지부터 떠오르곤 했다. 올해 5월 칸 영화제 때 프리모 위원장이 새로 복원했다며 DVD를 하나 선물로 줬다. 바로 ‘분홍신’이더라. 뭉클한 기분에 그걸 들고 혼자 한참 서 있었다. 영화는 늘 그렇게, 우연히 만나는 선물이었다. 어떻게 떠나겠는가.”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김동호 위원장::

―1937년 강원 홍천군 남면 화전리 출생
―1961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90년 한양대 행정학 석사
―1988∼1992년 영화진흥공사 사장
―1992∼1993년 문화부 차관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1997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
―2007년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오피시에
―2010년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심사위원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페어웰 파티’ 중 미니콘서트